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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성서읽기를 위한 신명기 따라잡기 2 신명기는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면 과연 어떤 삶이 펼쳐질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주는 책입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구원받았다고 하는데,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은 어떤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에 대한 길라잡이가 신명기입니다. 모세는 신명기 전반에 걸쳐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하나는 계명 준수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 정의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이후의 계획이며, 이 계획을 실행시키는 연료는 사랑입니다. 레위기와 민수기에서 차근 차근 율례와 법도를 안내했다면, 그것을 어떤 정신으로 지켜야 할 것인지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 정신이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잘 지켜야 할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면 공동체 안의 약한 사람들이 단지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어려움 겪지 않도록 돌봐야 할 것입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뿐 아니라 동물까지도 말입니다. 오늘날 보편정신인 것 같지만, 그 보편 정신을 형성한 것이 그리스도교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3천5백년 전, 고대 근동에서는 혁명적인 종교였습니다. 지금도 그 맥은 우리를 통해 계승되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화려한 우상과 형상을 중요시하는 종교를 일컬어 눈의 종교라고 합니다. 반면 그리스도교는 귀의 종교입니다. (장일선, 구약학)
여전히 라디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고, 우리 또한 이러한 감성과 취향을 이해합니다. 운전하면서도 라디오나 음악을 듣는 것은 시각 정보가 천지인 오늘 우리에게 또 다른 기쁨을 줍니다. 보는 것과 듣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그러나 누구나 확실한 것을 좋아합니다.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텔레비전이 나온 이후, 많은 이들의 우상은 TV가 되었고, 오늘날은 스마트폰과 같은 전자 기기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게 손에 쥐어주는 신앙은 언뜻 가치있어 보입니다. 신앙이 쑥쑥 자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위험합니다. 우주적 초월자를 형상화 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게 누군가 쥐어준다면, 그 신앙은 부분임을 기억하십시오. 신앙의 다중성과 복잡성은 우리 인문학과 과학으로 딱 떨어지는 경우가 몇 없습니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남겨두는 신비의 영역입니다. 화려한 예배당과 유니크한 우리 교회만의 십자가 이 또한 종교 개혁 이후로 보는 종교로서의 기능을 제거하고 남은 것들입니다만, 여전히 우리는 듣는 것보다 확실하게 눈에 보이는 것을 선호합니다. 눈으로 보고 즐기고 구경하는 종교는 수도 없이 생겼다 사라졌습니다. 우상은 언젠가 사라질 것들입니다. 귀의 종교는 시각을 넘는 상상의 풍부함이 필요합니다. 깨달음이 있고, 깊은 묵상이 있고, 두고 두고 곱씹는 고뇌가 있어 그 뿌리가 깊습니다. | 연중주일 신앙교육 |
공동체 성서읽기를 위한 신명기 따라잡기 신명기는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당하실 때 가장 많이 인용한 책입니다. 또 신약성서 곳곳에서 구약성서를 대표하는 사상으로 여러차례 인용되었습니다. 신명기에 대해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연극으로 비유해 봅니다. 사건의 시간은 이스라엘 회중이 광야 유랑을 마친 기원전 13세기입니다. 장소는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가나안이 내려다보이는 모압 평지입니다. 주인공은 모세이며, 막이 오르면 모세가 나와서 "오직 야훼만 섬겨야 한다"는 내용의 긴 독백을 전합니다. 마치 모노드라마와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 그 독백을 듣고 있는 사람이 우리 생각과 다릅니다. 그 관객들은 600년이나 훗날의 기원전 7세기 당시의 사람들입니다. 당시 요시아 왕은 성전에서 우연히 율법서를 발견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신명기의 일부입니다.(12-26장). 흐트러진 세태를 정비하고, 신명기에 따라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잊었던 언약과 율법을 회복하게 하는 말씀이라는 차원에서 오늘 우리에게도 가치가 풍성합니다. 한편, 기원후 70년 포로기 귀환 공동체의 성찰어린 메시지가 덧붙여져 신명기가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신명기는 회복의 말씀이자, 여러 문화와 세대에게 유효한 말씀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선교사의 소명을 품어야 합니다. 선교지의 전방과 후방이 뒤바뀌고 있어서 전방위적 선교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시들어가는 유럽과 북미의 현실에 비해 새로 복음이 전파되는 남미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는 열정적이고 대규모의 복음 전파가 믿을 수 없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1세기 초입에 많은 선교학자들은 북미가 곧 선교지라고 표명했습니다. 과연 어떤 방식으로 선교가 가능할지 한 번 상상해 봅니다. 우리가 만일 인도나 아이티에 선교사 파송이 됐다면 일단 먹여야 하고, 주사부터 놓아 준 다음, 아이들부터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지역에서 도움을 호소하는 이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고통당하지 않습니다. 병원에 가지 못해 힘든 사람들도 있지만, 약이 없어 죽음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못해 고통당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실제로 고통당하는 부분은 <소외>입니다. 인간 관계에서의 소외, 일상생활에서의 소외, 특별히 코로나가 거의 끝나가는 지금, 우리 생활이 하나씩 복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확실히 온라인으로 많은 부분이 전환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송금하는 서비스를 이용했고, 많은 사람들이 유튜브로 예배를 드렸고, 많은 사람들이 생전 안써보던 스마트폰-아이패드를 써 봤습니다. 문명의 발전은 편리한 쪽으로 이동합니다. 세탁기가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합니다. 여성들의 사회진출로 경제 구조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포스트 코로나로 인해 21세기 최고의 전환기가 다가옵니다. 바로 디지털 대 전환입니다. 격변의 시대에 소외와 생활의 불편함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을 수 있도록 돕는 데서 방향의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돌이킴(회개)를 선포하셨습니다. 민수기는 광야의 복음입니다. 왜 출애굽한 이들은 방황해야 했는가에 대한 답이 여기 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약속을 받고 애굽에서 나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하나님의 크신 일을 목도하고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1세대 대부분은 광야에서 멸망합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 음행하지 말자 …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7-11). 이들의 가장 주된 행위는 ‘원망’입니다. 음식과(11장) 물(20장), 길(21장) 때문에 악한 말로 원망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말을 들으시고 엄격하게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거역’입니다.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에게(12장), 백성들이 아낙 자손으로 인해 모세와 아론에게(14장), 더 심한 것은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이 250명의 리더들을 끌어들여 집단으로 모세와 아론을 거역한 것입니다(16장).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것은 ‘불신앙’입니다(13-14장). 그 때문에 그들은 광야에서 죽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저희 부부는 요즘 사랑에 빠졌습니다. 텃밭 가꾸기라는 새로운 놀이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일단 시작을 해놓고 보니 이건 취미생활이 아니라 농사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우리 교우님들이 미나리 고추 깻잎 나눌때는 거저 되는 일인 줄 알았는데, 직접 해보니 나눠줄만큼 하려면 우리같은 사람들은 사력을 다해도 될까말까 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진짜로 깨달은 것은 '모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부부간에 모르는 것은 서로 물어보는게 순리 아닙니까? 그런데 지난 한 달 내내 서로 물어봤지만 대답은 '몰라' 뿐입니다. 젠틀하게 '글쎄, 잘 모르겠는데? 한번 찾아 볼까?'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때가 좋았습니다. 그것도 한 두번이지, 세 번, 네 번, 열 번 물어봐도 모르는 것 투성이일때는 어떻게 젠틀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웃음만 날 뿐입니다. 우리 부부의 ‘몰라’라는 대답에는 보다 긴 문장이 숨어 있습니다. ‘나도 모르는 걸 뻔히 알면서 왜 계속 물어봐, 더이상 나에게 묻지 말아줘’라는 진짜 대답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게, 서로 모른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알아차린 지금 우리 부부는 ‘몰라’와도 사랑에 빠졌습니다. 이 말이 튀어 나올때마다 너무 재미있습니다.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세계가 있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된것이 알 수 없는 기쁨을 줍니다. 동반자 의식이랄까요? 그러다보니 쬐끔 아는 것도 ‘몰라’로 흡수가 되어버립니다. 서로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라도 괜시리 잘 모르는 것, 아주 모른다고 해 봅니다. 아는 척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다음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럼 우리 이렇게 해볼까?” 여러분, 사랑하기 딱 좋은 시절입니다. 공동체 성서읽기를 위한
레위기 따라잡기 레위기는 성경 속 다이아몬드와 같은 존재입니다. 레위기는 성도의 영광의 복음의 삶이 어떤것인지 드러냅니다. 유대인들이 자녀들에게 토라 교육을 통해 신앙을 전수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토라교육의 첫 출발이 창세기나 출애굽기가 아니라는 사실은 잘 모릅니다. 바로 레위기부터 시작됩니다. 이만큼 하나님과의 관계맺기에 있어서 레위기가 중요합니다. 원어인 히브리어로 쓰인 성서에서 레위기의 이름 뜻은 "그리고 그가 부르셨다"입니다. ‘그리고’는 창조하시고(창세기), 구원하신 (출애굽기) 하나님의 역사의 연장선에 있음을 드러냅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 레위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실제 레위기에는 "모세에게 이르시되"라는 말이 56번이나 나옵니다. 공교롭게도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부름받은 백성이라는 의미의 <교회>를 구성하고 있으며, 이제는 모세가 아니라 성서 전체를 통해 예배가운데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우리 공동체 여러분, 레위기와 함께 신실하고 거룩한 예배자가 되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몇일간의 여정 함께 하길 소망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가감 없이 전적으로 드리고(번제), 은혜에 감사하며 드리고(소제), 함께 마음을 나누며 드리며(화목제), 죄를 깨닫고 용서룰 구하며(속죄제), 부지중에 지은 죄의 용서를 구하는(속건제) 예배자 되시길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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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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