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늦은 눈서리가 가시고, 어느새 봄 바람이 살랑입니다. 햇살은 찬연합니다. 나뭇가지는 자꾸 괜찮다고, 나오라고 손짓합니다. 인간 종족이 얼마나 취약한데, 우리 속도 모르고 넌지시 귓속말을 건넵니다. 그렇지만 이제사 우리는 주제를 알았기에 멀리는 안나갑니다.
계속 좁은 공간에 있어야 하는 불편함은 계속되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뭔가를 추구하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운동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집에서 하는 운동, 홈 워크아웃을 한국 사람들은 "홈트"라고 부릅니다. “(In) Home Training”의 줄임말입니다. 모쪼록 이번 기회에 여러분도 '홈트'에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계 각국의 운동선수들이 홈트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게중 수영선수는 난감하겠더군요. 그 와중에 부엌 싱크대 위에 다리를 올려 놓고, 남편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리를 잡아준 채, 허공에서 수영 연습을 합니다. 이 정도면 환경과 장비를 탓할 사람이 없습니다. 트레이닝 자료를 살펴보니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무리하면 안되고, 둘째는 안 좋은 자세로 하면 안되고, 셋째는 버티는 근육이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특히 세번째 사실은 저에게 시사점이 있었습니다.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은 허리를 굽힌 채 다리 근육을 오랫동안 쓰는 운동을 합니다. 수영 선수는 다리를 고정시키고 복부 근육만으로 수평을 유지하는 훈련을 합니다. Stay at Home 명령이 길어진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버티는 근육”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몸과 마음의 활력을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상황은 모두 비슷하고, 호르몬 때문에 침울해 봤자 면역력만 떨어집니다. 이를 위해 운동으로 컨디션을 유지하시고, 또 가능하면 서로 전화로 하하호호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서로 사랑하면 좋은 일이 생깁니다. 이와 더불어 신앙의 근육을 발달시켜 보시기 바랍니다. 본회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두 가지 형태로만 존재합니다. 기도하는 가운데서와 사람들을 향한 의로운 행동 속에서“ 매일 기도로 하늘과 나를 잇고, 중보 기도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온 세상 피조물을 위해, 특별히 환자와 의료진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더하여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시면 좋겠습니다. 빛을 품고, 빛을 발하시길 빕니다. 2020년 봄의 일상은 유난히 다릅니다. 지구는 소생하고 있는 반면, 사람들은 고통받고 있습니다. 위에서 보시듯이, 고난 당하시고, 죽으신 예수의 매장 당시의 비통함을 바로크 화가 카라바조는 화폭에 잘 담아냈습니다. 미국의 화가 Marisa는 카라바조의 작품을 재해석하여 오늘의 비탄을 담았습니다. 감염병으로 고통받는 환자의 처지와, 누구나 감염될 수 있다는 공포감에 짓눌린 모두의 심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대조하여 잘 표현한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그러나 괜시리 가슴이 시려집니다. 예수는 백인이어야만 했던 바로크 화가들처럼, 의료진의 성스러운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저 그림의 주인공 또한 미국에서는 의료보험이 있는 백인일 확률이 높은 현실입니다. 보험이 없어서 박대당하는 소수계 이민자들, 아파도 숨기고 하루 벌어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서류미비자 스패니시들, 인구비율에 비해 기형적으로 높은 사망률을 기록하는 흑인들은 저 재해석된 그림 안에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병원에도 누울 자리가 없습니다. 미래학자 유발 하라리는 지금 이 시기 최대의 적은 분열(disunity)이라고 충고합니다. 피부색과 경제력으로 차별당하고 있는 이들을 위한 기도와 연대가 소중합니다. 햇살이 참 좋습니다. 그래서 미뤄왔던 화분을 만들었습니다. 아빠가 하는게 재미있어 보였는지, 학교 수업 대신 진행하는 온라인수업에 몰두해야 할 아이들이 후다닥 발코니로 뛰어나옵니다. 잘 됐습니다. 저는 졸지에 머슴에서 관리자로 올라섰습니다.
재밌어 보여봤자 일은 일입니다. 아이들의 손놀림이 영 시원찮습니다. 결국 뒤치다꺼리 하느라 힘 다 뺍니다. 관리자로 승진했다고 목에 힘 좀 줬는데, 부질없는 짓이었습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목에 힘 빼 그래야 살아”라는 메시지가 날 보고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수영장에 가면 몸에 힘을 빼야 물에 뜰 수 있듯이, 모든 운동을 할 때는 몸에 힘을 빼야 다치지 않고 효과를 보듯이 힘은 뭘 모르는 사람들이 주는 겁니다. 완장이라는 것도 차 본 사람이 능수능란하지, 처음 찬 사람은 으스대기만 할 뿐 실속이 없습니다. 4주째 교회 문을 닫았습니다. 각자 집에서 가정예배를 드리고 계실 겁니다. 여기에 인터넷이 되는 분들은 온라인 함께 드리고 있습니다. (Netflix가 되는 TV가 있으면 YouTube에서 우리 교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배 실황을 레코딩 하는 것도 처음이라 힘이 많이 들어갑니다. 사람이 커졌다 작아졌다, 소리가 잘들렸다 안들렸다 속상한 마음에 몸은 긴장을 늦추지 못합니다. 몇 주 지나니, 그 마음 밑바닥에는 욕심이 숨어 있었음을 알아차립니다. 힘이 들어가는 이유는 뭔가 잘해보려고 하기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제 성향을 돌아봅니다. 처음 해봤어도 건성건성 할 수가 없어서 밤을 샙니다. 화분을 단장하며 멍하니 생각하는 동안 다시 아이들이 질문 공세를 폅니다. “씨앗이 왜 죽어야 하냐”며 슬퍼합니다. 이 깊은 사연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사실 사물의 죽음과 부활은 아이들 입장에선 자연스럽지요. 자연은 늘 죽고 부활하는데, 아이들은 그걸 여과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니까요. 누군가 그러더군요. 나무에 순이 돋는 자리는 겨우내 눈과 비와 바람을 맞아가며 상처난 곳이라고. 우리의 아픔과 불안, 그리고 상처는 희망의 새 순이 돋아날 자리일 겁니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나시 나게 하시는(고린도전서 15장) 부활의 신비는 우리 가까이 있습니다. 슬픔을 넘어 비탄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오늘, 이 역설적인 부활의 아침에도 주님은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산문(散文, prose)이 그 어느때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몇 사람으로부터 "우리 시대에 이런 일을 겪다니(요}?"라는 한탄을 들었습니다. 그 놀라움의 가면 밑에는 공포심이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마음의 외침에 따라 미디어를 접합니다. 이렇게 산문으로 아침을 엽니다.
신문과 TV, YouTube와 SNS를 통해 새로운 소식을 접하고 있노라면 어느새 미디어 비평가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산문 생활이 며칠 지나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납니다. 언어의 범람, 그리고 과잉된 정보가 나의 나됨을 흔듭니다. 신년에 제가 소개해 드린 시 한 소절인데 기억하시나요? “인간은 산문과 타산만으로 살 수 없고 시와 뜻의 차원에서 호흡해야 존재할 수 있다.” 이렇듯, 우리 삶에는 굴곡이 있고 리듬이 있습니다. 자연만물은 반듯반듯 똑같이 생긴 것을 허하지 않습니다. 미물도 다 생각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무미건조한 톤으로 대화하는 것 보셨나요? 그렇다면 좋은 개그의 소재가 될 수 있을겁니다. 자연은 그 자체로 색과 몸짓의 향연이며, 노래입니다. 자연에 가까운 아이들에겐 빛이 나고, 입을 열면 시가 흘러나옵니다. 누구나 각각의 모양과 뜻이 존재합니다. 규격에 맞춰 재단된 운율 없는 이야기의 홍수 속에 호흡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누구나 기억하는 과학자입니다. 그 대표성 때문인지, “당신은 신을 믿는가?”라는 물음을 많이 접했습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러한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신비적인 감격… 이러한 감격을 전혀 모르는 사람, 경이를 느낄 수도 없고 경외에 홀릴 수도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과 다름없으며 꺼져버린 촛불이다. … 오직 간접적으로만 우리에게 미치는 그 어떤 것(아름다움과 숭고함)이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종교성이다. 이러한 의미로만, 나는 독실한 종교인이다. 그의 고백은 꺼져버린 촛불인지도 모른채 양심의 위안만으로도 만족하는 종교성 없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울림을 줍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경이와 경외를 느껴본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 너머의 우리의 무의식은 그것을 기억합니다. 본향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서 경험한 아름다움을 기억합니다. 예수를 따르는 숭고함을 기억합니다. 대면 예배를 드리지 못한 지 28일째입니다. 나도 모르게 교회를 생각하며 눈물이 나는 분도 계십니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열처녀의 호롱불처럼, 불이 꺼지지 않게 뜻을 간직하는 일, 찬양하는 일,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잔잔히 요구되는 일입니다. 4월 5일 종려주일 하늘뜻 펴기에서 소개한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성공회 신학자인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의 다짐입니다. 2020년 상반기 전세계를 강타한 COVID-19으로 인해 현재 로드아일랜드 주에는 Stay at Home order가 내려졌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새로운 다짐을 세워나갈 시간인지 모르겠습니다. 희년을 살기 -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 나는 다가오는 50번째 생일에 희년을 선포합니다. - 씨를 뿌리지 않고, 수확하지도 않으며, 헛간에 곡식을 모으지도 않는 것 -- 노예에게 자유와 빛을 탕감해주고, 누구든 무엇이든 비우는 해 1년 동안 , 나는 매주 40시간을 일할 예정이며, 가능한 한 집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함해서, 가장 친밀한 관계에 참여 할 것입니다. 나는 매일 내가 만나는 이웃을 사랑할 것이며, 나는 할수있는 한 인간다운 규모의 삶을 살것이며, 나를 과장하는 것과 나의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 모두에서 내가 무엇에 힘과 에너지를 많이 쓰는지를 볼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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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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