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ick reminder that if the roles were reversed and young people were more likely to die, our parents and grandparents would do absolutely anything and everything to save us. “To people who call the virus 'boomer remover'
현 시국에 미국에서 공감을 얻고 있는 말입니다. “만약 코로나가 노인이 아닌 젊은이들에게서 더 사망율이 높았다면, 우리의 부모님과 조부모님들은 우리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했을 것이다”. 맞는 말이고, 저 또한 공감되었습니다. 격주로 수요일마다 스캇 목사와 데이빗 목사와 함께 교회 마당에서 수다 모임을 가집니다. 푸른 눈의 두 백인 목사들은 한국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며, 유교문화권 국가들의 남을 향한 배려 정신에 감명받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한 문화와 이타심이야말로 예수의 정신이라 생각한답니다. 그러고 보니 한국의 상황이 급속히 좋아지던 시절, 서구인들이 ‘눈치'라는 단어를 배우고 있음이 기억났습니다. 한국인들에게 남에게 민폐끼치지 않는 문화는 너무 당연해서 예의 축에도 들지 않습니다. 실제로 한인과 중국인이 몰려 사는 뉴욕 플러싱의 마스크 착용률이 뉴욕시티에서 가장 높은 99퍼센트라고 합니다. 한편 현 시국에 한국에서 공감을 얻고 있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부산 샘터교회 안중덕 목사의 설교가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회자되었습니다. 지면 관계로 제목만 나열해 보면 이렇습니다. 설명이 포함된 이미지는 홈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것은 잠잠하라는 뜻. 손을 자주 씻으라는 것은 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뜻. 사람과 거리두기를 하라는 것은 자연과 가까이 하라는 뜻 대면예배를 금지하라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주를 바라보라는 뜻 집합을 금지하라는 것은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라는 뜻 어떻게든 예전으로 돌아가려는 마음, 부족한 것을 다른 것으로라도 채우려는 마음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저부터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때에 따라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에 겸비하게 귀를 기울여보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교회는 세상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바꾼다고 부지런을 떨었습니다. 말하고, 계획을 짜고, 교회를 조직하는데 몰두했습니다. 이제는 그럴 공간도, 시간도, 사람도 없습니다. 비로소 흩어질 때, 그리고 일상의 하나님을 만날 때입니다. 한국인들에게 두드러진 이타심과 배려심같은 좋은 성품에 만족하고 기뻐하는 것도 즐거운 일입니다. 이제 나가서 타자를 즐겁게 할 때입니다. 소외되고 연약한 이웃도 타자입니다, 또한 인간들의 소비문화에 몸살났던 지구도 보듬어야 할 타자입니다 슬프고 재미있는 현상이 양국간에 나타납니다. 사실상 세계에서 가장 코로나 대처를 못하고 있는 나라인 미국에서는 정의로운 Black Lives Matter운동이 일어나고, 가장 잘하고 있는 나라로 꼽히는 한국에서는 마스크를 벗어제낀 시민들이 광화문에 모여 정부를 규탄합니다. BLM으로 인해 바이러스가 심각해졌다는 보도는 찾기 힘들었지만, 광화문 군중들을 통해서는 일파만파 코로나 확진자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공든 탑이 무너지는게 한 순간입니다. 그 중심에 예수와 동떨어진 한국 교회가 있습니다.
경희대 물리학과 김상욱 교수는 “중세 페스트의 비극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되풀이될 줄이야”라고 한탄하며 며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민들의 공감을 샀습니다. 페스트가 창궐하자 사람들은 교회에 모여 기도했고, 모인 사람들을 통해 병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이런 식으로 마을주민 전체가 며칠 만에 전멸하기도 했다. 물론 사람들은 모이면 안 된다는 것을 희생을 치르며 깨달아갔다. 하지만 교회는 페스트의 원인을 인간의 타락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이를 참회하기 위한 속죄행진을 진행했다. 이런 행진이 있을 때마다 대규모로 희생자가 나왔지만, 속죄행진은 몇 백 년 동안 페스트가 창궐할 때마다 되풀이된다. "네 이웃을 감염시켜라". 누군가의 망상 속에서 주님의 음성처럼 들리는 악마의 속삭임입니다. 예수께서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고, 중세때야 몰랐다지만 지금은 모이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누군가는 꼭 광화문에만 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텍사스와 플로리다, 미시간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 주변에도 존재합니다. 유럽과 미국을 강타한 반지성주의가 어느새 한국으로 옮아갑니다. 잘 보십시오. 그 안에는 인간 소외가 있습니다. 인정투쟁입니다. 그들 안에 살려달라는 아우성이 있습니다. 내 주변에 변화된 세상을 잘 따라오지 못한다고 구박받는 사람이 있나요? 컴퓨터나 스마트폰 좀 알려달라면 차근차근 가르쳐 주는 대신 후다닥 해결해 주고 만 적 있나요? 그 분들을 꼭 끌어안아 주세요. 물론 물리적인 거리는 지켜야겠지만요. 정신과 의사이자 작가로 활동하는 정혜신은 세월호 유가족들의 상처에 기름을 붓고 싸매어 주는 시간을 보내면서 그 반대편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상심하고 분노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따돌림'이나 '악마화'가 아니라,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듣고 또 들어드리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꼭 허그하지 않아도, 우리 맑은 눈과 귀로 꼭 안아드릴 수 있는 거지요. 혹시 나와 다른 이들을 혐오하고 있진 않습니까? 그들의 삶의 맥락과 여정을 보는 대신 무시하고 정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혐오로 이기는 역사는 혐오로 망합니다. 사랑이 이깁니다. 얼마전 전기가 끊겨 Black-out이 되었습니다. 그제야 부랴부랴 촛불을 찾는데, 결국 촛불이 집에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 정월 초하루 대청소 하던 날, 작심하고 오랫동안 모은 초를 다 도네이션 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플래시 라이트를 찾아봐도, 그 또한 없습니다. 휴대폰에 플래시가 있으니, 고장난 걸 버리면서도 새로 살 생각이 없었습니다.
비상용품들을 왜 챙기지 않았을까 후회가 몰려올 때쯤, 8년 전 은하가 뱃속에 있을 때가 생각났습니다. 허리케인 '샌디'의 기억입니다. 임신 6개월인데, 안타깝게도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무시무시한 미국 재해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수많은 조언들을 가벼이 여겼습니다. 덕분에 뱃속의 아이까지 셋이서 된통 샌디의 쓴 맛을 봤습니다. 전기로 돌아가는 난방은 안 돌아가고, 우두커니 멈춘 냉장고를 신경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날이 추웠습니다. 아이와 산모가 걱정됐습니다. 겨우겨우 가까운 교회에서 개스 히터를 빌려왔는데, 아뿔싸, 근처에는 개스통이 죄다 동났습니다. 팔지도 않는 개스 사러 방방 곡곡 돌아다닌 끝에 하나 건졌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급하게 사려면 뭐든 없고, 제너레이터를 갖고 있으면 냉장고를 유지할 수 있으며, 아파트에는 개인이 제너레이터를 연결할 수 없다는 것을 :-) 그 뒤로 여섯 번의 이사를 했습니다. 이사 할때마다 무게만 차지하는 재난 용품이 그렇게 눈에 거슬렸나 봅니다. 심지어 텍사스에서 이사비용 때문에 거의 빈손으로 왔을 때도 챙겨왔던 물건을 박스채 도네이션 하고 나니, 다시 찾을 일이 생깁니다. 이게 다 '미니멀 라이프'때문입니다. 우리 부부가 신기하게 딱 맞는 기호가 바로 그것입니다. 제 머리 모양도, 의복도 미니멀라이프의 결과입니다. 얼마전 Zoom 화상미팅으로 만난 선배 목사는 제 소견을 들어보더니 "목양 일념이네?" 라고 정리해 줍니다. 목양 일념 아닌 목사를 본 적이 없어서, 나만 그렇다고 생색낼 수 없어서, 허허 미소로 답했습니다. 목양에 이념, 삼념이 있겠습니까? 생각해보니, 우리는 미니멀라이프를 할 필요가 없는 이들입니다. 물건을 버리는게 목적이 아니라 단순하고 의미있는 삶을 살기 위해 하는 건데, 성령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미 단순하고 의미있게 살아갑니다. 말씀과 기도, 떡을 떼고 나누는 것에 전념하는 사람들이 되니까요. 초대교회 사람들처럼요. 그리고 이웃들, 교우들… 어려운 꼴 못보고 십시일반 마음을 모아주시는 우리교회 사람들 처럼요. 선한 믿음의 사람들… 축복합니다. 어느덧 리오프닝이 한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교우님들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환히 웃는 모습이 자연스레 상상됩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라는 선현들의 말씀처럼, 당일날 한꺼번에 듣는 것보다, 미리 말씀드리면 마음의 준비에 도움이 되실 것 같아 현장예배 유의사항을 말씀드립니다.
•마스크는 반드시 착용해 주세요. •발열 체크에 협조해 주세요. •지정 좌석에 앉아주세요. •반가워도 사회적 거리를 꼭 지켜주세요. •화장실은 한 사람씩 들어가 주세요. •찬양은 가급적 허밍으로 참여해 주세요. •헌금은 입구에 비치된 헌금함에 넣어주세요. •친교는 주차장에서 해주세요. 어느덧 8월입니다. 지난 주에 오픈한 교회들이 있어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심경이 복잡합니다. 강력한 보호조치를 취하는 교회들의 경우 65세 이상 빼고, 아이들 둔 가정 빼고, 열 있는 사람, 몸 안좋은 사람 빼고 나니 교인의 10프로쯤 모입니다. 그래도 한데 모인데 감격하여 설교자들은 목이 매입니다. 교인들도 기쁨의 감동으로 눈물을 흘립니다. 이토록 모이는 것에 대한 갈망이 있고, 함께 목소리를 높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어하는 것, 이전에 우리도 솔직히 몰랐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한 번도 걸어보지 않은 길입니다.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걷습니다. 어색하지만, 정성스레 새로운 예배를 드립니다. 가장 큰 변화는 찬양입니다. 미국교회는 목소리를 높여 찬양하지 않고, 미리 교인 일부가 녹음한 화면을 보고 속으로 찬양하기로 했답니다. 일부 한인 교회는 허밍으로 찬양합니다.(우리도 그렇게 하면 좋겠습니다). 다름아닌 찬양이 우리 공동체의 연약한 분들을 아프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속이 상합니다. 그러나 속으로 드리는 찬양을 되려 기쁘게 받으실 것 같습니다. 미국은 지금 코로나가 가장 극심했던 4월과 비슷해져 가고 있습니다. 나라와 위정자들을 위해서, 의료진과 판매 종사자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야외에서도 감염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핵심은 미증상자 전파입니다. CDC(질병관리본부)의 예측대로, 8월 7일 기준, 감염자 5백만명의 열 배라 생각하고 조심하시는게 좋겠습니다. 4월처럼 조심스레 몸을 돌보십시오. 인적이 드문 숲 길을 걷다가 둥굴래 잎을 발견한 적 있습니다. 보슬비가 내린 참에 맨 손으로 조심스레 캐보니 새끼 손가락만한 뿌리가 제 몸을 내주었습니다. 고이 집에 가져 와서 차를 끓였을 때 그 깔끔하고 깊은 느낌은 지금까지 여운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때 그 자리로 돌아간 듯한 강렬한 느낌을 주는 것은 맛입니다. 군산 사람인 저에게 정작 기억에 남는 맛은 부산 자갈치 시장의 회맛입니다. 여행 때 맛봤으니까요. 회를 먹을 때면 96년 여름, 태양이 작렬하던 부산의 바다 향기가 스칩니다. 이렇게 여행과 음식은 뗄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한국 문화만의 독특한 인사가 "진지 드셨습니까?", "식사 자리 한 번 마련합시다"인 것도 우리가 맛을 아는 민족이라는 증거입니다. 적어도 지금은 만나서 밥먹는 일은 어려워서 이런 인사들이 무색합니다. 맛을 함께 누리지 못하는 현실에 함께 누리는 문화도 층이 한결 얇아지는 느낌입니다. 사실, 한인교회 입장에서 매 주일 모일때 친교의 가치는 거의 예배의 가치에 가깝습니다.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마태11:19)는 못된 비난을 감수하셨던 예수께서 한인교회의 어떤 면을 사랑하실까 상상해 보자면 식탁공동체일거라 생각합니다. 세상 어느나라의 교회도 이렇게까지 애정 넘치고, 정성스럽진 않거든요.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았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출애굽 공동체가 배운 만나의 원리입니다. 이 평등의 원리가 통용되는 자리가 바로 식탁공동체입니다. 만나의 원리를 성실히 지키는 우리 교회는 말씀에 순종하는 공동체입니다. 시편에 보면 성전에 오르는 기쁨을 노래하는 시가 많습니다. 매 주일 아침 일찍부터 몸 단장, 음식 준비로부터 예배를 향한 여행은 시작됩니다. 다만, 음식을 나누는 일이 어려워진 현실인만큼, 예배 안에서의 성도의 교제, 곧 친교가 훨씬 풍부하게 경험되어야 할 것입니다. 서로 악수도 못하는데 어떻게 더 깊은 친교를 경험할까요? 신앙의 층계를 한층 더 올라가는 좋은 질문입니다. 성찬례의 신비에 깊이 참여하여 공동체의 친교를 즐기는 것도 방법입니다. 단순한 만남의 즐거움 대신, 일주일간의 중보기도로 변화된 타인의 일상을 그윽히 바라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결국 예배를 예배답게 드릴 때, 그리스도 안에서 친교는 풍성해집니다. 더불어 우리가 세상의 음식이 되는 것도 친교의 방법입니다. 힘없는 이들을 향한 이해와 연대와 섬김이 질 좋은 재료가 되어 맛있게 한 상 차리는 모습이 성경적 선교입니다. 이렇게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교회의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좋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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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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