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재기가 기승입니다. 사재기도 부익부 빈익빈일까요? 냉장고와 가라지의 크기만큼 형편이 나뉩니다. 정작 필요로 하는 물자가 없어서 식당은 밥을 못하고, 병원은 진료를 못하며, 모든 사람들이 화장지가 떨어져 가고 있지만 사재기는 오늘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어떡해야 할까요?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따라 일용할 양식을 구합니다. 앞으로 몇 달 먹을 양식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입니다. Stay at home 명령과 자주 외부환경에 노출되는 위험을 줄이기 위한 적절한 쇼핑 정도는 일용할 양식에 속할 것입니다. 먹는 문제는 우리 삶의 근간입니다. 예수의 처음 시험은 돌로 빵으로 만들라는 유혹이었고, 처음 기적은 물로 포도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소풍을 가든, 출근을 하든, 전쟁을 나가든 빵과 음료가 있어야 합니다. 한 여인은 예수에게 개들도 상 아래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는 먹는다며, 은혜를 간청했습니다. 주님의 짧은 공생애 가운데 마지막 일주일을 몇 주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목요일의 성찬 장면으로 가봅시다. 공식적으로는 인간의 육신을 입은 예수의 마지막 끼니였습니다. 메시지는 간결합니다. "받아서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우리가 매 달 드리는 성찬의 하일라이트인 제정사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써 영원히 기억할 그 한 문장의 말씀 이전에 예수께서 행하신 모습에 초점을 맞춰보겠습니다. 예수께서는 빵을 (1)들어서, (2)축복하시고, (3)떼어서, (4)나누십니다. 이 네 가지 행위에 주목한 현대신학자 헨리 나우엔에게서 얻은 아이디어입니다. 주는 사람의 행위(들어서 축복한 후 떼어서 나누기)와 받는 사람의 행위(받아서 먹기)가 구분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것을 행할 때 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들림 받고, 육신이 깨어지사 사랑의 나눔으로 모든 죄를 씻으신 것 처럼, 성찬을 행할 때마다 예수의 사건이 나의 사건이 되길 소망해야 합니다. 나누진 않고, 받기만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리면 몰라서 그런 것이고, 성인이면 욕심이 많아서 그렇다고 불려집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정신은 순종입니다. 예수의 마지막 말씀에 순종하여 받거니 주거니 하는게 제자된 도리입니다. 민심이 흉흉하여 극성일 때, 성찬의 정신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한 줄기 빛처럼 환히 세상을 비출 것입니다. 전 세계에 유례없는 환난이 찾아왔습니다. 내 이웃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는 것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니 더 현실로 와 닿습니다. 모이기에 힘써야 할 믿는 자들의 공동체도 예외는 아닙니다. 사실은 우리가 잊었던 게 있습니다. 모이기에 힘쓰고, 흩어지기에도 힘써야 할진대, 흩어지는데는 그간 소홀했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드리는 가정예배는 흩어지는 교회의 모형입니다. 예배의 주체가 되어서 드리는 예배, 단독자로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예배의 주인공이 되어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예배를 온라인으로 제공합니다. 우리 교회만으로는 준비하는데 힘에 부칩니다. 우드릿지교회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힘을 합쳐서 예배드리기로 했습니다. 평소 연합예배보다 한국어를 틈틈히 사용하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 계획했던 하늘뜻펴기 Lent Series는 칼럼으로 대신하려 합니다. 신앙의 성숙에 이르는 사순절이 되는데 코로나 바이러스가 문제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더 실존적인 기도와 묵상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이끌 것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배신입니다. 마지막 일주일의 클라이막스로 향하는 수요일 저녁, 갸룟 유다는 은 30양에 예수를 배신합니다. 사랑의 반댓말은 미움이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워한다는 건 사랑할게 아직 남았다는 뜻이니까요.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정지된 오늘, 그간의 무관심을 털어버리고, 비로소 사랑의 증거자가 되어야 할 때입니다. 유다는 사실 제자들 중 핵심이었을 것입니다. 돈 맡은 자였으니까요. 그만큼 책임감도 강했을 것입니다. 그의 책임감은 나중에 자살로 이어질 만큼 막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순간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예수 공동체에 회의를 느끼게 된 터닝 포인트는 아마도 마리아 향유 사건일 것입니다. 자신은 사실 향유를 낭비할 정도로 여유가 없었습니다. 빨리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했으니까요. 프레임 이론이라는 게 있습니다. 자신의 가치관에 맞춰서 세상을 보는 방식입니다. 프레임이 전혀 없으면 줏대없는 사람이겠지만, 너무 매사에 적용해도 피곤합니다. 유기적으로 요령껏 사용해야 합니다. 언젠가 주님도 내 프레임에서 벗어나면 배신할 지 모르니까요, 유다처럼. 지금은 잠시 멈추고, 내 프레임으로부터도 “거리 두기”를 해야 할 시간입니다. 대한민국 곳곳에 정화의 물결이 넘실거립니다. 심지어 교회도 문을 닫고 방역을 합니다. 미국에선 손 세정제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위생 관념이 오래전부터 확립된 곳이지만, 위생을 유지할 물건이 없으니 당혹스럽습니다.
한 교우님과 통화하던 중, 가톨릭의 성수가 무슨 의미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사제가 축성하면 성스럽게 변한다는 물이 문제로 떠오릅니다. 일부 성당에서는 성수 제공을 중단시키거나, 핸드 새니타이저로 대체되는 현상이 있습니다. 축성이라는 신학적 의미와 바이러스의 창궐이라는 의료적 의미가 창과 방패는 될 수 없는 법입니다. 이번 코로나사태로 물리적인 물질 안에 신성한 힘이 들어있다는 믿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봅니다. 믿음의 영역과 유물의 영역을 구분시키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벌레만도 못한 바이러스로 인해 사고의 대 전환이 필요해진 시점에 그간 인간이 쌓아올린 생각과 교리의 탑이 버거워 보입니다. 성수로 시작했지만, 성경책, 강대상, 교회 건물 전체가 성스러운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 그 자체가 성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예배를 소위 “성전"에서 드리지 못한다고 눈물 흘렸다는 일부 목사들의 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 안에만 계시므로 전세계에서 예루살렘 성전에 반드시 방문해야 한다는 고대의 신앙고백과 유사합니다. 건물이나 개인의 위생과 더불어 정화해야 할 것은 우리의 생각이며,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코로나 시국을 지켜보는 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계명>
“하나님께서 벌 주셨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상처를 보면 기름을 부어주고, 싸매어 주는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을 기억할 때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가장 쉽게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은 말입니다. 우리의 입술을 교회 밖 사람들은 지켜봅니다. 덕을 쌓습니다. 선행은 개신교에서 핵심적으로 권장되는 신앙양식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렇게 어수선한 난리판에 같이 휩쓸리지 않고, 허리를 세우고 주위를 둘러봅시다. 어두울 때 빛이 훨씬 환한 법입니다. 잠시 멈춥니다. 우리는 82국번을 국제전화용으로 사용하는 빠른 민족이지만, 이번에는 잠시 쉬었다 갑시다. 너무 빨리 가다가 보지 못한 삶의 아름다운 것들을 유심히 봅시다. 길가에 피어나는 새순, 고요한 봄날의 햇살, 세상의 주인인양 분주하던 인간을 넘어서 자연 만물 앞에 소중함을 되새겨 봅시다. 버1. 두려움이 창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창궐이 문제입니다만, 전 세계인들은 이미 두려움이라는 심리적 바이러스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두려움은 몸에 해를 끼치지 않아서 괜찮을까요? 아닙니다. 두려움은 패닉을 불러오고, 패닉은 공황장애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심하지 않은 두려움일지라도 일상생활에 피곤함을 누적시키고, 면역력을 떨어뜨립니다. 진정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입니다.
2. 신앙인들은 어떻습니까? 어떤 신앙인들은 이번 기회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라는 증거라고 합니다. 독성을 가진 이단 신천지가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랍니다. 그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한 신앙인의 관심이 조금 다른데 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지금 탁상놀음이나 강건너 불구경 할 때는 아닙니다. 당장 우는 자들이 있고, 하나님께서 믿음의 자녀들이 겸비하여 그들과 함께 하길 바라십니다. 3. 신앙인 그룹도 아닌데, 곳곳에에서 도움의 손길이 이어지는 모습을 봅니다. 의료인 오 백여명이 격전지 대구로 향합니다. 평범한 시민들의 온정의 손길이 모아집니다. 험한 바다로 뛰어든 세월호 잠수사들, 자원봉사자들, 태안 기름 유출사건 때 돌을 닦던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 놓는 사랑이 가장 큰 사랑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인류 보편 의식 가운데 살아 움직임을 느낍니다. 4. 지난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은 깊은 어둠을 찾아 들어가는 절기입니다. 밝은 데서 어두운 터널로 들어가면 잠시 멈춰야 합니다. 눈이 적응이 되고, 작은 불빛에도 형체를 분간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게 좋습니다. 바이러스의 창궐로 인해 우리 고국을 비롯하여 주요 나라들이 일단 정지했습니다. 잠시 숨을 가다듬고 불확실한 깊은 어둠과 공포의 여정이지만, 자그마한 빛에 의지하여 한 걸음씩 내디딥시다. 세상도, 교회도... 마침내 부활의 희망가를 부르게 될 날을 기다리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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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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