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복 받게 되어 있는 8가지 이유입니다.
1. 가난: 우리 제일한인교회 교우님들은 빈 도화지와 같습니다. 보통 교회에는 영적으로 교만하여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교회에서 이런 분들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겸손히 잘 받아들이는 천국백성입니다. 2. 애통: 우리는 애통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병으로 연약한 자녀와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고, 서로의 건강을 진심으로 배려합니다. 하늘의 위로가 성령을 통해 임하실 것입니다. 3. 온유: 자만하거나 고집부리는 성도가 없습니다. 친절하고 오래 참는 것은 우리 자랑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온유입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되기를 원하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4. 정의: 수많은 목회자들이 정의를 외쳤던 예언자적 직무를 감당하는 데 부담스러워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우님들은 하나님의 의를 구현하는데 거리낌이 없기에, 말씀을 잘 받아들입니다. 5. 긍휼: 예수께서는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입니다“ 라고 자비를 보이셨습니다. 마땅히 불쌍히 여김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교우님들은 긍휼에 열려 있고, 잘 실천하고 계십니다. 6. 청결: 순수함으로는 우리 교우님들을 따라갈 자가 없습니다. 요즘 비즈니스에 도움 되려고 교회를 다닌다지요? 그러나 청결치 못한 마음으로 직분을 탐내거나 남보다 높은 데 앉으려는 사람은 못봤습니다. 7. 화평: 어쩌다 보니,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의 모범을 따르지 못하게 되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갈라진 상처가 흔적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처는 우리로 “주님의 평화”를 남다른 마음으로 부르게 하였고,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8. 박해: 정직하고 신실한 공동체를 일구고 살아가다 보면 자연히 이간질과 박해는 따라옵니다. 사탄의 사업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영혼을 평안케 하시는 예수님을 붙잡고 수십년째 교회를 지키고 있는 여러분은 복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이번 한 주간 받을 복을 한 번 세어 보십시오. 모든 교우님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유년 시절, 어느 설날이었습니다. 친척들이 한 상에 둘러 앉아 맛있게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우리집 냄새와 사뭇 다른 할머니 댁의 공기, 왁자지껄한 사촌들, 재미있는 덕담을 나누머 하하호호하던 그 날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바로 어제 일처럼 기억하는 이유는 큰아버지의 한 말씀 덕분입니다. 요즘처럼 먹을 것이 흔하지 않던 시절, 저에게 명절 때 고기반찬은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기를 몇 점 집어먹을 때, 큰 아버지께서 핀잔을 주셨습니다. ‘너는 요즘에 너무 살이 쪘으니까 채소만 먹으라 ‘는 말에 풀이 죽어서 젓가락질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다 집에 온 그날 명절은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사촌들은 ‘와하하’ 하며 한 번 웃어넘겼을 일이 저에게는 작은 상처가 되었습니다. 어린 아이들도 상처를 받습니다. 어린 아이들도 다 기억합니다. 그런데 상처가 약이 되는 경우도 꽤 있습니다. 저는 그날부로 체육관에 다녔고, 눈빛도 달라졌고, 학교에서 인기도 많아졌습니다. 평생 선생님을 하다가 은퇴하신 큰아버지의 신의 한 수였다고 한편으로는 고맙게 생각합니다. 한 스승 목사님은 ‘혼이 나봐야 혼이 돌아온다’며 혼 내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해합니다. 그런데 운동을 잘 하고, 인기가 많아지는 것은 부차적인 소득이었습니다. 그날 상처로 인한 가장 큰 소득은 ‘부당함에 대한 관점’이 생겼다는 점입니다. 어려서부터 유순했던 의외로 정의롭게 살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많다고 어린 아이를 여럿 앞에서 망신 주면 안되는 것처럼, 힘이 센 사람이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일을 두고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남성이 여성을,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큰 사람이 작은 사람을, 주류가 소수자를 괴롭히는 일에 누구나 민감하게 반응할 수는 없지만, 저처럼 상처를 받아봤던 사람은 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모두 상처 입은 이들이었습니다. 상처입은 이들을 치유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래전 영화 ‘밀양’에서 인상깊은 대사가 있었습니다. "제 죄는 하느님께서 용서해 주셨습니다"라는 살인범의 고백입니다.
이는 복음을 왜곡하여 받아들이는 행태입니다. 우리 죄를 깨끗이 씻어주신다는 말을 그 살인법도 오래 묵상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우리 주 예수께서 내 죄를 사해주신것에 한참을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살인범에 의해 아들을 잃게 된 엄마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지만, '어떻게 내가 용서하기도 전에 하느님이 먼저 용서하실 수 있어요'라고 하소연합니다. 사실은 그 살인범을 용서하러 갔는데도, 그 살인범의 용서 운운하는 현실의 부조리함 앞에서 울부짖습니다. 얼마전 흥행했던 ‘더 글로리’라는 미니시리즈가 세간의 화제입니다. 친교 시간에 장로님 한 분의 추천을 받아 보게 됐는데, 종교적 코드가 여럿 보였습니다. 고통받는 피해자 눈에 비친 빛의 십자가는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제작자의 의도는 모르지만, 어쩌면 예수께서도 그 빛의 십자가에 매달려 같이 고통받고 계셨을지 모르겠습니다. 밀양의 살인자와 비슷한 고백을 하는 배역이 또한 인상적입니다. 피해자를 괴롭히는 학교폭력 공포의 5인방 중에 대형교회 목사님 딸이 있습니다. 매직기라고 불리는 머리를 펴주는 헤어 고데기로 주인공을 괴롭히는데 방관으로 일조했던 그녀는 훗날 달러가 가득 들은 가방을 건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난 너한테 한 짓 다 회개하고 구원 받았어.” 혹자들은 이런 구원관, 이런 용서의 관점이 세계교회 입장에서 봤을 때 상당히 독특해서, 'K-기독교’라는 장르를 만들어냈습니다. 바야흐로 K의 시대입니다. K컬쳐를 필두로 한 K에는 명과 암이 존재합니다. 다만 K 기독교가 차별에 앞장서고, 부패에 연루되고, 부당하게 누군가를 괴롭히고,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구원관에 머무르지 않고 회개하고 돌아서서 빛으로 오신 예수님 편에 서기를 함께 기도합시다. 어렸을 때 제 부친께서는 밥알을 백 번씩 씹어서 삼켜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물처럼 만들라고 아이가 알아듣게 설명을 곁들이셨습니다.
음식을 아주 잘게 자르다 보면 물에 가까워집니다. 기력이 없어서 죽도 못먹는 사람은 미음을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씹어도, 아무리 잘게 만들려고 해도 공기처럼 잘게 나눌 수는 없는 법입니다. 다시 말해 물 보다 부드러운게 바람입니다. 바람보다 부드러운 게 있다면 햇살이 있습니다. 공기 입자보다 태양의 입자가 훨씬 작습니다. 결국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근원적으로 이 태양이 주는 양분을 먹고 삽니다. 그러나 육의 양식보다 중요한 영의 양식이 되어주시는 존재가 있습니다. 이 존재는 햇살보다 더 미세합니다.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존재한다... 실재한다고 말해도 믿을 수 있는 사람있고, 없는 사람 따로 있습니다. 이 존재는 바로 우리 주님입니다. 존재의 근원되시는 주님께서,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께서 마치 햇살과도 같이 온 세상을 비추십니다. 먹이사슬의 최상위에 사람이 있고, 그 밑으로 온갖 크고 작은 동식물들이 줄지어 있다면 그 가장 밑바닥에는 가장 작은 입자로 존재하는 햇살이 있습니다. 그 빛을 만드신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창조주이심과 동시에 햇살보다 더 근원적으로, 가장 낮은 곳으로 우리에게 와주신 분이 우리가 고백하는 성삼위 하느님이십니다. 예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라고 스스로를 말씀하셨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또한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한 영원한 존재가 오늘 요한의 세례로 기꺼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목숨은 스스로 버리는 자가 사는 법입니다. 존재의 근원자가 스스로 내어주심으로 영원에 이르는 모범을 선생님의 입장으로 우리에게 보이신 사건, 곧 ‘세례’입니다. 해바라기라는 한국의 오래된 음악 그룹이 있습니다. 히트곡 '사랑으로'라는 노래가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밖에도 수많은 명곡이 있지만, 왠일인지 지난 주간에 ‘모두가 사랑이에요’ 라는 노래 가사가 제 입술에 맴돌았습니다.
참고로, 해마다 마지막 날 즈음이면 한 해를 돌아보며 호흡을 깊게 하고, 일단 정지해 봅니다. 몸도 정지해 보고, 스케줄도 정지해 봅니다. 그 중에서 판단을 중지해 본다는 의미로 ‘에포케’ (epoché)라는 기법도 사용해 봅니다. 무조건적인 동의를 보류 (withholding of assent) 해 보면, 생각을 맑게 하는데 제법 도움이 됩니다. 그렇게 고요함을 누리고 있을 때, 제 마음에서는 어떤 연유로 찬송가도 아닌 흘러간 유행가 가사가 흘러나왔을지 궁금했습니다. 뉴욕에 가족여행을 다녀와서 기분이 좋았던 탓이었을까요? 크리스마스 때 만난 반가운 얼굴들과, 교우님들과 나눈 따스한 사랑도 적잖이 한 몫 했을겁니다. 사실 '판단 중지'를 해 보기 전까지 신년 목회 방향을 가지고 씨름을 한참 하고 있었습니다. 공동체 성서읽기와 말씀사역으로 코로나 시절을 잘 견뎌낼 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과 더불어 이제는 교회가 ‘하느님의 선교 동역자로서의 교회'라는 본질에 걸맞게 하나 둘 업데이트 되어야 할 때라고 방향을 잡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모두가 사랑이라는 고백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모두가 사랑이라는 뜻은 참 좋은데 과연 어떤 배경인지 가사를 찾아보고 그 심오함에 무릎을 탁 쳤습니다. 첫 가사는 ‘모두가 이별이에요'였습니다. 이별을 해 보고서야 온 세상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은 특별한 경험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별의 어둠을 통과해 본 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세계가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사랑은 질척질척함이 아니라 단호한 이별 이후에 찾아오는 순전한 감정입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이별할 것이 있나봅니다. 과거의 것, 썩어질 것은 2022년에 두고 순전하게 새해를 맞이합시다. 새해엔 다른건 몰라도 우선 사랑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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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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