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에 보면 지극한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경상초라는 사람이 있는데, 외루산이라는 산 밑에 작은 공동체를 꾸렸습니다. 하루하루 보면 모자란 것 같은데, 일 년이 지나고 나면 남는 희안한 공동체였습니다. 삼년이 지나자 크게 번성했습니다. 그 비결이 뭔가 하고 봤더니, 지혜로운 신하들과 어진 신하들을 다 내보냈다는 거에요. 이상한 원리지만 한 번 들여다 봅시다.
둥글둥글 사랑 많고 어진 사람이 관리자가 되면 희안하게 백성들이 서로 다투고, 지혜로운 사람이 관리자가 되면 희안하게 백성들이 서로 도둑질할 것이니 백성들이 풍요로워질 새가 없다는 말입니다. 대신, ‘우둔한 사람’, ‘용모를 꾸미지 않는 사람’이 결국 백성들을 풍요롭게 한다는 겁니다. 우둔한 사람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우직한 사람입니다. 자기 몸가짐 바르게 할 줄 알고, 자기 밥벌이 충실하게 할 줄 알고, 스승이 주는 가르침에 지고지순하게 순종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용모를 꾸미지 않는 사람’에 장자는 사고로 다리가 잘린 사람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다리가 잘린 사람이 화장품을 다 버리는 법이다.” 장애를 입게 되면 먼저는 세상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지에 온통 관심이 쏠릴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 그 산을 넘긴 사람은 다리가 없으니 얼굴이라도 꾸며야 되겠다는 마음까지도 내다 버린 사람이 바로 용모를 꾸미지 않는 사람, 곧 세상의 인정에 초연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우둔하고 용모를 꾸미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능력 그 자체만으로 보면 똑똑하지도 않고 다정하지도 않지만 이런 사람들이 바로 지극한 제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제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천지 만물이 햇살과 바람과 비면 충분히 자라듯이, 무심한듯 자기 일 충실히 해 나가는 제자들이 일구어가는 나라는 자연히 풍성하게 자랄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날 공동 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오늘 우리는 이 땅의 아버지들을 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 그대로 지음받은 아버지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힘을 느끼게 해 주셨고, 관대함과 지혜의 원천이신 당신을 경험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편의와 안락함보다 자녀들의 필요를 우선시한 아버지들을 기억합니다. 이민자로써 언어가 통하지 않더라도 실패를 딛고 다시 도전하는 용기로 어떻게든 좋은 것을 주고자 하셨던 그 마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아버지들 마음 한 구석에는 늘 미안함이 간직되어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과거의 쓰라린 마음에 머물지 않고 그리스도의 겸손과 성령께서 주시는 위로로 장성한 분량에 다시 이르러 우뚝 서게 하소서. 더불어 이미 천국에 계신 아버지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 기억속에 사랑의 존재로 살아계시고 지금도 우리 인생가운데 지혜로 함께 하시는 그 인생을 자랑스러워 하고, 기뻐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다 말씀하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의 신비를 전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대림절부터 시작해서 지난 주일 성령강림주일까지 모든 공식적인 교회력이 마감됐습니다. 오늘부터는 연중주일이라고 하는 일상적인 주일을 보내게 됩니다. 일상 주일의 시작점은 삼위일체주일입니다.
이 시간을 저는 요리에 빗대어 표현하고 싶습니다, 지난 성령강림주일까지 예수께서 이렇게 우리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우리 <성도의 일상>을 재료로 삼아, 도우시는 성령께서 레서피가 되어서 세상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멋드러진 요리를 만들어나시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지난 주에 버지니아에서 들려온 친구 가족의 소식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교회에서 센스있게 잘 만든 티셔츠를 받아서 고등학생 자녀에게 권해준 엄마가 있었습니다. 그 자녀도 신앙심이 깊은데도 펄쩍 뛰더라는 겁니다. 그 티셔츠 입고 가면 학교에서 웃음거리가 된다는 말입니다.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현재 미국 상황에서 주된 원인은 백인 복음주의자들이 이웃을 환대하거나 세상과 벗하는 대신 총기를 들고 스스로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자신 종족들만의 자유를 선택한 댓가입니다. 맨해튼에서 목회하는 팀 켈러 목사는 세상 속 그리스도인들이 둘 중 하나라고 진단합니다. 첫째는 정체성을 숨기고 사람대 사람으로 관계 맺는 유형입니다. The blend-in approac라고 합니다. 신앙인임을 들키고 싶지 않은 심리가 엿보입니다. 둘째는 신앙적 정체성을 숨기지는 않지만, 그만큼 깊게 교제하지 않는 유형입니다. The Christian bubble approac라고 합니다. 사사건건 부딛치기도 싫고, 헌신하기도 싫고, 그리스도인의 품위를 드러내는 것도 부담스러운 마음입니다. 삼위 하나님은 보다 더 깊이, 진실한 관계로 하나님 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하십니다. 그리고 너희도 나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한국에서 가족 행사가 있었습니다. 목회자이신 아버지께서 50년간 목회하신 것을 축하하는 ‘성역 50주년‘ 기념 예배를 드렸습니다.
고국에 방문할 수 없는 저는, 아버지의 목회를 돌아보며, 동영상을 만들어서 선물드렸습니다. 수백 장의 사진을 가지고 5분 안에 집어 넣으려니,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사역의 엑기스만 추려야 했습니다. 50년 세월에 각종 연합기구나 지역사회 단체 활동이 이어져 수십 가지 맡은 일이 있었지만, 그런 직위를 다 나열할 가치는 없었습니다.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때론 독재 정권에 맞서서 항거하고, 타종교인들과 대화하며, 평화를 일구어 나갔던 충성스러운 목회 여정을 다 담을 수는 없었습니다. 한국부흥선교단 단장으로 헌신하고, 수 백개 교회에 전도 특강을 하러 다니며, 특별히 중재자로 각종 교회와 목회자들을 화해하게 만든 사건들도 그 5분 안에는 담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많은 가짓수의 일을 했는지를 전시하는 자리는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은 목사로써 하나님 앞에 어떤 진정성을 가지고 목양을 했는지가 포인트였습니다. 한 영혼을 사랑하고, 설교와 목회에 대해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는지 골자만 정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인생의 곁가지들을 돌아봤습니다. 이곳 저곳에 쓰임 받고, 기여하는 활동은 세상을 더 환하게 만들고, 하나님 나라를 일구는 사역입니다. 여전히 마음 가는 곳이 많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이 훗날 하나님 보시기에 좋을 것입니다. 더불어 아버지처럼 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가지고 제 목회를 돌아봤습니다. 매일 새벽 교인들께 말씀 전하시고, 성전 곳곳을 깨끗이 정비하시고, 일과 중에는 등을 기대는 모습 한 번 볼 수 없었던, 늘 기도하셨던 그런 기본기가 뼈대가 되어 50년의 성역을 이루어나갔음을 깨달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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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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