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어느 새 한 해의 끝에 와 있습니다.
인생의 한정된 시간이 갈수록 소중하며, 그렇기에 열심히 살았습니다. 어려울 때 발버둥치며 당신께 매달렸고, 기쁠 땐 아이처럼 세상 시름을 잊었습니다. 화가 날 땐 다른 사람을 힘겹게 하고 성품의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기도와 말씀의 은혜를 체험하며 쌓아온 신앙이 한 순간의 시험에 물거품이 되기도 했습니다. 말씀 앞에 내 영혼을 비추기 보다는 다른 이의 변화를 기대했습니다. 모든 순간 변함없는 사랑으로 저희 곁에 계셨던 주님, 감사합니다. 늘 이유를 대며 합리화하는 저희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소서.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들, 잠잠히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임재를 기다립니다. 새해에도 하느님 나라로 가는 영적 순례의 길을 멈추지 않고, 진정어린 기도와 헌신의 씨앗을 뿌릴 때 살림의 영이신 성령님 역사하여 주소서. 말씀으로 영과 육을 말끔히 고쳐주시고, 역경과 어려움을 승리로 이끌어 주소서. 가족과 친구들, 이웃들, 교회 공동체가 서로 감싸주고 사랑하게 하소서. 모든 역병이 사라져 모든 일상이 회복되고 안정되길 간절히 간구합니다. 저희들 다시 희망을 품고 새로운 출발을 할 때, 주님, 도와 주소서. 생명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당신이 어린이로 오신 날 우리는
아직 어린이가 되지 못한 복잡한 생각과 체면의 무게를 그대로 지닌 채 당신 앞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 어서 오십시오 비록 당신을 모시기엔 부끄러운 가슴이오나 당신을 기꺼이 안아드리겠습니다 당신처럼 단순하고, 정직하고 겸손할 수 있는 용기를 배우게 해 주십시오 당신과 함께 따뜻하고 온유한 어린이의 마음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습니다 당신이 빛으로 오신 날 우리는 아직 살라 버리지 못한 죄의 어둠 그대로 지닌 채 당신께 왔습니다. 이 세상에 어린이로 오신 하느님의 탄생 이 세상에 빛과 사랑으로 오신 하느님의 탄생 우리가 보고 들은 이 놀라운 일을 다시 믿게 하여 주십시오 믿을수록 놀라운 이 일을 가장 기쁜 소식으로 다시 말하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이 세상 모든 이가 구원을 얻게 하여 주십시오. 어서 오십시오 예수님 우리의 별이 되신 예수 <당신이 오신 날 우리는 | 이해인 > 작년 여름 어느 산 속에서 샘물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네 식구가 쭈그리고 앉아서 신기하게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느새 다들 팔 걷어 붙이고 나뭇잎도 치워보고, 돌도 옮겨보고, 발도 담가보면서 한참을 샘과 함께 했습니다.
아내와 저는 그 샘이 어떻게 솟는 건지 머리로는 배웠지만, 그 구멍이 내 눈앞에 나타났을 때, 콸콸콸 솟아 나오는 물을 만져볼 때 그저 신비할 따름이지요. 그렇지만, 그 원리를 모르는 아이들은 우리 어른들보다 훨씬 더 신기했을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사실 모든 게 신기합니다. 아기들을 보면 어떻습니까? 무조건 입으로 그 신기함을 맛보려고 하지요. 유년기 아이들은 어떻습니까? 일단 덤벼듭니다. 뛰어듭니다. 손을 뻗어 봅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배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잘 모르니까 뜨거운 것, 뾰족한 것에도 손을 팍팍 대 봅니다. 신기한 건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고뭉치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 호기심과 펄펄 넘치는 기운, 그리고 걱정 근심 두려움 없는 마음이 세상에 적잖은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아이들은 기쁨의 존재입니다. 존재만으로도 기쁨을 줍니다. 사진만 보내와도 기쁨을 줍니다. 아이들을 품에 안아보기만 해도, 위해서 기도만 잠시 해도 나도 모르게 차오르는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도 어렸을 때 누군가의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어린시절을 한 번 회상해 보면 어떻습니까? 대체로 춥고 배고픈 시절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외적인 조건입니다. 그런 조건과 별개로 느꼈던 어떤 기쁨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침에 잘 자고 일어나고, 엄마가 차려준 밥 먹고, 오늘도 뭐하고 놀지? 하는 생각에 마음이 부풀어 있던 시절, 아무 걱정 없던 시절, 누가 뭐라고만 안하면 오늘 바울 사도가 말하는 <항상 기뻐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동네 꼬마 녀석들과 만나서 코흘리고 다투고 넘어지고해도 늘 기운이 넘치고, 깔깔거리고 다녔던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50대 중반의 K 프리랜서는 어느 날 자기 아내가 갑자기 긴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버렸다. 아내의 친구가 항암치료 때문에 삭발한 다음 창피해서 외출을 못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자‘머리 깎은 한 사람은 쳐다보지만 두 사람은 안 쳐다본다’며 자신도 긴 머리카락을 친구처럼 빡빡 깎아버린 것이다. 그 뒤로 시장이든 백화점이든 늘 함께 다녔다. 비구니가 되는 줄 알고 매일 좌불안석이었던 K 프리랜서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50대 중반의 중견 출판사 H 대표는 어느 날 골목에서 남루한 행색의 ‘걸인’ 같은 사내를 보고 지폐를 꺼내 적선하려다가 멈칫했다. 돈을 불쑥 내미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잠시 고민하다가 사내의 등을 향해 말했다. "아저씨, 이거 흘리고 가셨어요.“ 바닥에 떨어진 돈을 주워 주인에게 돌려주는 척하며 적선했다. 마치 톨스토이의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한 장면처럼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이 따뜻한 일화는 우리 주변에 흔할 것 같으면서도 흔하지 않은 얘기들이다. 암투병중인 친구를 위해 같이 삭발했다는 얘기를 아직 들어본 적 없고 적선은 하되 ‘걸인’을 돈의 주인으로 만들어 명분을 세워주고 자존심을 배려하는 방법까지 고민했다는 얘기를 아직 들어본 적 없다. 요즘처럼 ‘공감’과 ‘배려’가 크게 강조되는 시대도 드물다. 그러나 대부분 먼발치에서 잠시 눈물짓고 잠시 슬퍼하는 것으로 공감과 배려를 ‘소비’해 버린다. 공감과 배려는 브랜드가 아니다. 소비도 아니다. 값싼 동정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작은 감동의 생산이고 그 생산이 모여 감동의 연대를 이룬다. 암투병 환자는 삭발한 친구 하나만으로도 이미 절반은 나았을 것이고 ‘걸인’은 일부러 자신의 ‘떨어진 자존감’을 세워주는 것 하나만으로도 긴 터널 같은 일상에 잠시나마 빛 같은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가슴에 화상을 입는 것은 영화 속의 거창한 영웅담이 아니라 이처럼 숨어있는 꽃들의 작은 감동들 때문이다. 이들의 인품과 마음이 진짜 생산적인 공감과 배려의 씨앗이다. 그 씨앗이 자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거둔다. 그리고 다시 봄이 온다. -이산하(시인) |
아카이브
4월 2023
카테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