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사롭고 싱그러웠습니다. Cold and Warm이 조화롭게 만나는 뉴잉글랜드의 짧은 가을이 드디어 왔습니다. 가치로 환원할 수 없는 기쁨이 담긴 오늘의 날씨를 저는 무척이나 사랑합니다.
예배를 마친 후, 식사 없는 친교는 여전히 생소합니다. 대면 예배를 맨 처음 드린 2주 전에는 금새 돌아가셔서 얼마나 아쉬웠는지요. 아마도 다른 교우들에게 피해를 입힐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서둘러 집으로 향하셨던 것 같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앞마당 친교를 시도해 봤습니다. 날이 금새 쌀쌀해질테니 얼마 못할 겁니다. 그래도 오늘을 살아야지요. 한 분이 여름내 뒷뜰 텃밭에서 기른 유기농 고추를 한아름 쏟아 놓습니다. 또 한 분은 조금씩 나눠 담습니다. 둘씩 셋씩 멀리 떨어져 서서 정답게 이야기 꽃을 피웁니다.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났는데, 점심도 건너뛰고, 마스크 낀 채 얘기를 나눕니다. 예배당에 들어오면서부터 꼈으니 대단합니다. 얼마나 배고프실까 염려가 스쳤지만, 저부터도 육신의 배고픔 너머 존재하는 그리움과 반가움이 올라옵니다. 밤새 살랑이는 바람과 바삭한 햇살이 떠나지 않는다면 우리도 떠나지 않을 듯한, 시간이 멈춘 듯한 오후입니다. ‘오늘은 성령께서 친히 친교를 베푸시는구나’라고 고백됩니다. 마치 오병이어 기적이 일어나기 직전, 언덕에 모인 배고픈지 몰랐던 군중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도 오색창연한 대화가 오갔지만, 이런 서로에 대한 간절함이 얼마만일까요? Light talk을 나누다 점점 농도 짙은 이야기들이 오고갑니다. 말씀과 선교를 끼니삼아 의견을 나눕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좋으셨을까? 연약함으로 인해 현장 예배를 함께 드리지 못하는 교우도 계시지만, 어서 코로나가 기적처럼 수그러들어서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대면하면 좋겠습니다. 또한 일찍 가시지 마시고, 앞마당 친교로 함께하면 좋겠습니다. 보고싶었으니까요. “백번 잘하다 한번 못하면 원수가 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많이 겪어 보셨을겁니다. 우리한테는 좀 평범하고, 당연한 얘긴데, 어딘가에서 야... 이사람들, 속담 한 번 참 기가막히게 잘 지었구나 무릎을 치면서 공감하는 분이 계시다면, 그분은 바로 우리 하나님이실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너무 잘해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인간은 망각의 동물입니다. 기억이 안납니다. 잘해준 기억은 안나지만, 희안하게 서운한 건 잘 잊혀지지 않습니다. 또 처참했던 경험, 창피했던 기억들, 그때 그 시절, 그 사람들은 다 잊었어도 나는 못 잊습니다. 특별히 우리 민족은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기억합니다. 이건 경험하지 않은 세대도 세대간의 전승으로 기억합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히브리 노예 시절과 바빌론 포로기를 기억하듯 말입니다. 일제 불매운동은 어느 시대에나 통하는 코드입니다. 빨간색이라면 덜컥 겁나는 사람도 있고, 기본소득 같은 정책에 벌벌 떱니다. 민족적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입니다. 왜 아픈 기억은 잊혀지지가 않을까? 왜 한 번 서운한게 그리 오래갈까? 궁금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UT Austin 심리 연구팀이 살펴봤습니다. 망각이 기억보다 왜 더 어려울까 봤더니, 자면서 정보들은 다 흘려보낸다는거에요. 다 갖고 살면 힘들고, 효율적으로 뇌를 관리하기 위해 창고를 정리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오늘 낮에 운전하면서 봤던 앞차 자동차 번호판 같은 시각적인 정보가 흘려 보내집니다. 또 아침에 들었던 뉴스 같은 청각적인 정보도 흘려 보내집니다. 그리고 가슴에 감각정보로 남았던 것들은 보존한다는 거에요. 은혜는 쉽게 잊고, 못 해준 것만 기억에 남는 원인이 밝혀졌습니다. 그런 기억이 가슴에 쌓이면 뭐가 됩니까? 한이 된다, 한이 서린다고 합니다. 이 연구를 살펴보다보니, 목사로써 주목할 점이 있었습니다. 시각정보나 청각정보보다 더 먼저 흘려보내지는 것이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초월적 정보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경험하는 초월의 신비가 자는 동안 흘러내려진다는 의미는 곧, 날마다 솟는 샘물과 같은 그날의 초월로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한은 담아두는게 아니라 흘러 보내야 합니다. 과학이 밝혔듯이 그것은 내 능력 밖의 일입니다. 매일 경험하는 초월의 신비로 덧입힐 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뜻밖의 집단적 트라우마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아픈 기억과 한으로 쌓이고, 엉뚱한 데서 터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신비와 위로가 매일 공급되길 지금 갈망하고 계십니까? 대면예배가 재개되었습니다. 이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분들께 교회 문을 활짝 열어드릴 마음에 설레는 밤입니다. 한참 더울 때 계획하고는 노심초사했지만, 다행히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 어느새 계절이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초초했지만, 그래도 봄날은 갔고, 여름도 지나갑니다. 상추랑 깻잎도 예년같진 않지만 그런대로 제 몫을 다 했답니다. 고추는 끝물입니다.
그 와중에, 캘리포니아와 오리건의 산불이 무척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코로나로 엎친데 불까지 덮쳤습니다. 붉은색 사진들이 마치 화성같은 느낌을 줍니다. 우리 현실과 다른 초 현실인듯 보이나, 이것이 오늘 우리 삶의 자리입니다. 세상이 흉흉해도 나무들은 그 자리를 지키고 나이테를 키워가고 있었는데 그만 화마에 명을 다하고 있네요. 기후 변화를 위해 뭔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기후 위기입니다. 그동안 교회들은 미온적으로, 혹은 신앙 양심과 현실 사이에서 타협해 가며 조금씩 동의해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진짜 뭔가 행동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습니다. 코로나 위기에 기후 위기가 겹치니 고통받는 제 3세계 아이들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여전히 아이들은 5초에 한 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생산되는 음식은 전 세계 120억명이 먹을 수 있는 양이고, 대부분 쓰레기가 되는 슬픈 현실앞에 우리는 오늘도 숟가락을 듭니다. 때론 미어지는 마음으로, 때론 무심코... 기아 위기를 위해서도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조속히 행동하지 않으면 코로나로 인해 연말까지 2억명이 넘는 아이들이 목숨을 잃게 된다고 유엔 세계 식량기구가 발표했습니다. 너무나 처절한 적자생존의 현실을 코로나가 들춰냈습니다. 민망합니다. 그런데, 남을 돕기는 커녕, 당장 생계가 극단적으로 어려워진 사람들이 실제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미국에서 말입니다. 지난 봄, 대규모 실직으로 인해 푸드 뱅크에 줄이 길어질때만 해도, 21세기 민주주의의 힘을 믿었습니다. 곧 해결 되겠지... 그런데 현실은 종업원들을 포함해서 기업 전체가 위기입니다. 기후 위기, 기아 위기, 기업 위기라는 세 가지 위기 앞에서 우리는 옷깃을 다시 여미고,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섰습니다. 이런 위기 가운데, 다행히 우리는 생존해서 감사하다고 할 수 없는 현실 앞에 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차원의 고백이 예배를 통해 드러납니다. 6개월 만의 대면예배라는 반가움과 기쁨을 누린 귀한 예배자들을 보시며 ‘보시기에 좋았더라'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꾼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아픔을 넘어, 우리 교우들의 아픔, 더 나아가 하나님의 아파하시는 역사의 현장으로 파송되길 소망합시다. 우리 교회는 현장예배 재개에 대한 결정에 있어서 북미 한인 교회중에서 가장 보수적인 결정을 내린 공동체 중 하나입니다. 적어도 로드아일랜드 지역에서는 가장 느린 리오프닝입니다. 무엇보다 생명이 소중하기에 조심해서 한 걸음씩 내딛기로 결정한 바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심각한 상태이며, 2차 유행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쌀쌀해질 때 2차 유행이 시작될 것을 대비하여 잠깐이라도 대면하여 예배를 드리기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기대 51%, 염려 49%로 리오프닝을 꼼꼼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중간에 끊김 없이 지속적으로 대면예배를 이어가면 더욱 감사할 것입니다. 코로나 이전과 이후는 BC(Before Corona)와 AD(After Disease)로 나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냥 넘길 소리는 아닌게, 산업 구조의 전반적인 구조조정이 불가피한 시점임에 모두 공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닐겁니다. "많은 사람은 교회가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때문에 걱정을 한다. 어떤 이는 큰 교회도 같은 운명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교회가 다시 예전과 같이 될까봐 걱정이다" 빌리그래함센터 전무이사와 휘튼대학의 교수를 역임했던 석학 에드 스테처의 일갈입니다. 교회개혁 운동가도, 영성가도 아닌 보수적 복음주의 를 표방하는 한 연구원의 염려가 우리 공동체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넌지시 제시해 줍니다. 이제 변화는 숙명입니다. 몇 주전 열렸던 온라인 세미나에서 LA UMC에서 사역하는 이창민 목사가 던진 3R이 조금은 구체적인 사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Reset, Recover, Rebound 이 세 가지가 펜데믹으로 인한 변화의 기회로 작동한다는 주장입니다. Reset은 분주하게 앞만 보고 달리던 교회가 멈춰서 예수의 정신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Recover는 내적으로 예배공동체의 회복과 외적으로 이웃을 섬기는 선교공동체의 회복을 말합니다. 그리고 Rebound는 공이 튀기듯이 다시 회복될 것이라는 희망을 말합니다. 물론, 에드 교수의 걱정처럼 이전으로 되돌아갈 우려도 있지만,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게 현실입니다. 특별히 저는 Rebound에 주목합니다. 우리교회는 열린 공동체면서 다양한 목소리들이 공존하는 미국 내 몇 안되는 귀한 역사를 자랑합니다. 이 강단에서 전하는 복음적이면서 변혁적인 메시지가 온라인에서, 말씀을 사모하는 많은 이들에게 희망이 되는 모습에 가능성을 봅니다. 향후 뉴노말이 정착될 2년 정도의 시간을 두고, 새 플랫폼으로 재편되는 꿈을 품어봅니다. 마틴 루터 킹의 꿈이 지금도 진행형이듯, 걷다보면 언젠가 길이 나오리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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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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