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보 1면을 장식한 화가 램브란트는 엠마오 도상에 대한 몇 가지 작품을 남겼습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어느 누가 보더라도 묵상으로 이끌어주는 힘이 있는 그림들입니다.
당대 최고의 작가 램브란트는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그리고 부유하게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 삶에 한 번의 굴곡을 주십니다. 어느날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 뒤로 화가였던 램브란트는 붓을 내던졌습니다. 오늘 길 위의 두 제자들처럼 인생의 엠마오로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상실의 아픔을 딛고 신을 찾게 된 램브란트는 역사에 길이 남을 성화를 그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인생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출발하게 된 새로운 여정이 그 그림들 안에 담겨져 있었습니다. 당시 황금시대를 구가하던 네덜란드는 그 어느 나라보다 세속적인 국가였습니다. 튤립 구근 한 뿌리에 집한채 가격이 나갈 정도였습니다. 하다하다 투자할데가 없으니까 마치 오늘날 비트코인처럼, ‘튤립’을 하나 정해놓고 점점 더 비싼 값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런 시대였으니, 튤립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림도 투자대상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램브란트도 루벤스의 그림을 포함해서 여러 유명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투자를 모르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돈이 안되는 길을 선택합니다. 하느님의 자리를 돈이 차지해 버린 그런 세상에서 성경의 이야기를 그려나가기 시작합니다. 아쉽게도 ‘예수믿고 성공하는’ 동화같은 결말은 아닙니다. 말년엔 빚을 감당치 못하고 파산했습니다. 그도 우리처럼 인생의 명암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빛과 어둠의 화가’라는 그의 칭호처럼 하나님께서 그 손을 들어 사용하신 작품들은 수백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환한 빛의 묵상을 우리에게 안겨주고 있습니다. 생명의 신비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간절한 심정으로 당신을 기다립니다. 오직 당신만이 우리 영혼의 피난처이며, 오직 당신을 통해서만 영원을 경험하오니, 우리 온 영혼을 당신께 기울입니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참 기쁨의 원천이시며 세상이 알 수 없는 참 평안의 근원 되시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믿습니다. 지금, 걸음을 잠시 멈추고 여기, 예배의 자리에 섭니다. 삼위 하나님, 임재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눈을 밝히시고, 가슴을 뜨겁게 하옵소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엠마오로 향하는 길에서 동행하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요 몇 주간 도서관 왔다갔다 하는 길에 조금씩 페인트를 벗기고 있는 집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페인트를 저런 속도로 벗기다가는 여름 지나서 페인트 칠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그럴 계획이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면서 페인트 벗기는 일의 고단함을 묵상해 봤습니다. 페인트를 칠하려면 오래된 페인트를 먼저 벗겨야 됩니다. 쉽게 벗겨지는 화학 약품이 있기는 한데, 그래도 Sand Paper로 마무리를 해야 깔끔하게 준비가 되는 법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새롭게 은혜를 덧입히려면, 그 이전에 기존에 갖고 있던 두어 가지 오해들을 깨끗이 벗겨내야 합니다. 첫 번째 오해는 부활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만한 웅장한 스케일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신문이 만일 있었다면 1면이 아니라 사회면에 작은 기사로 나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은 부활신앙의 렌즈로 모든 일을 묶어서 바라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매일 같은 일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지나가던 소식이었습니다. 다만 소수의 사람들의 눈과 귀와 가슴을 의심스럽게 만들어 놓고서, 그들이 다시는 흔들릴 수 없는 변화를 경험한 은밀한 사건이 부활이었습니다. 두 번째 오해는 부활이 사람들의 수명에 어떤 변화도 주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도 도마도 마리아도 수명을 마치고 천국으로 향했습니다. 다시 부활한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낡은 페인트를 벗기면 뽀얀 원목이 나오듯이, 진짜 부활은 산뜻하다기보다, 약간 심심한 느낌입니다. 그 심심함은 고급 파인 다이닝의 정갈한 음식의 심심함과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참된 부활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이해하는 것보다 예수님이 더 바라시는 것은 부활의 의미를 신앙으로 체화시켜 살아가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예전에 여기 가까운 플리머스 민속촌에 한 번 다녀왔습니다. 가서 보니까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에 도착한 필그림들이 살았던 정착촌을 재현해 놓았습니다. 꽤 볼만 했습니다.
배우들이 옛날 옷을 입고 돌아다니면서 일상생활을 합니다. 장작도 쌓고 책도 읽고 요리도 합니다. 말투도 영국말씨를 쓰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인상깊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집집마다 뒷뜰에 만들어논 텃밭이었습니다. 그 텃밭에 실제 식물을 심어놨습니다. 씨앗을 심어놓고 그 결실이 맺히는 것을 보고 있자면 필그림들이 얼마나 행복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필그림들이 바다를 건너 여기 도착했을 때는 다들 죽었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착을 하고 나서 뒷뜰에 뭘 심으니까 자랍니다. 죽지 않고 살아서 한참을 두고 열매를 맺습니다. 어쩌면 그 작물들이 자신들의 운명같기도 했을 겁니다. 텃밭을 보면서 장미빛 미래를 꿈 꾸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놀이터가 인상깊었습니다. 1620년에 도착해서 1627년에는 애들이 60명이 넘어갔습니다. 커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또 얼마나 희망에 찼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부활신앙을 토대로 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이라는 것은 반드시 나는 죽고 예수로 살아야 하는 숙명을 가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뚜렷이 바라보는 것은 소망이지 죽음은 아닙니다. 필그림들이 그러했듯이,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해야 하듯이 신앙이라는 것은 이 죽을 것 같은 고비가 넘어가면 그 뒤에 무엇이 있을까? 하는 소망을 가지는 믿음입니다. 인생은 소망가운데 즐거운 것입니다. 기쁨이 우리를 이끄는 것이 하늘의 법칙입니다. 사순절이나 크리스마스보다 먼저 생긴 절기가 바로 부활절입니다. 성령이 처음 강림하신 날까지 오순절-오십일을 기쁨으로 보냈습니다. 앞으로 오십일간 여러분의 삶이 기쁨으로 가득하시고, 그 기쁨이 이웃에 넘쳐 흐르길 소망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사택이 교회와 붙어 있었습니다. 교회 김치라도 담으려면 우리집 부엌과 거실을 내어줘야 했지요. 주일 점심이면 어린이부 교사들이 우리집에서 상을 여러개 펴고 왁자지껄 라면 파티를 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생활과 가정 생활이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교회절기가 우리집 절기였습니다.
당시 저는 계란을 좋아하는 소년이었습니다. 부활절에 유난히 신났습니다. 삶다가 깨진 것도 먹고, 그냥도 먹고, 꾸미고 난 다음에도 먹었습니다. 그러나 공짜는 아니었습니다. 밤새도록 꾸미는 것도 여신도들과 함께 우리 가정의 몫이었습니다. 부활절 분위기로 교회도 꾸며야 했습니다. 훗날 전도사, 목사가 돼도 같은 일은 계속됐습니다. 이렇게 평생을 교회 절기와 가까이 지낸 저도, 적응이 안되는 날이 하루 있습니다. 바로 부활절 전날입니다. 교회력으로는 성 토요일이라고 합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시고, 부활절 새벽까지의 '신의 침묵'의 시간입니다. 고요한 날이지요. 그런데 사람의 감정은 그렇게 쉽게 차분해지지 않습니다. 성금요일까지의 그 슬픔과 절망의 감정이 남아 있고, 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러 가는 두 제자의 달음박질처럼 벅찬 소망을 예비하는 날입니다. 묘한 감정이 서로 교차되는 가운데, 그 둘 중 어느 하나도 아닌 고요함에 머물러야 하는 미션이 주어지는 날입니다. 이번 한 주간은 성 주간 Holy Week이라고 합니다. 성 주간을 맞이하는 기본 마음가짐이 바로 이러한 고요함입니다. 사순절기동안 요란함을 피하고, 절제와 침묵으로 순례길을 걸어오셨다면 참 잘하셨습니다. 성주간에는 지난 6주간의 말씀,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을 묵상하시면서 고요히 주의 행적을 지켜봅시다. 여러 감정들이 교차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가고자 하는 예수의 길을 지켜 보호하실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그 고요한 아침의 적막을 깨고 돌문이 열리는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실 것입니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
우리의 기도와 찬양을 받아주소서. 세상으로 보냄을 받고 나그네로 살다가 생명의 원천으로 돌아가야 할 인생이오니 창조주 하느님만 의지함이 마땅합니다. 오늘 이 시간, 모든 일상을 멈추고, 온갖 걱정과 즐거움을 내려놓고,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나가오니 성령으로 우리의 영혼을 채워주소서. 주님의 고난이 참된 구원의 길임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성도들, 그 구원을 사모하는 심정으로 나왔사오니 성 삼위 하느님, 지금-여기에 임재하소서. 고난을 넘어 부활생명으로 참 소망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님,
주께서 오래전 걸으셨던 그 여정을 따라 우리도 하루 하루 걷습니다. 주께서 직면하셨던 믿음의 공동체의 균열과 배신, 그리고 그 이면에 감추인 이해타산과 마주합니다. 그 낡고 오래된 관습은 우리 신앙의 일부를 여전히 물들이고 있습니다. 주님, 이 사순의 시절 내가 하느님보다 더 잘 안다는 우리의 교만함을 내려놓게 하소서. 우리의 영적 무지함을 용서하소서.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게 하소서. 우리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님,
주께서 오래전 걸으셨던 그 여정을 따라 우리도 하루 하루 걷습니다. 주께서 직면하셨던 믿음의 공동체의 균열과 배신, 그리고 그 이면에 감추인 이해타산과 마주합니다. 그 낡고 오래된 관습은 우리 신앙의 일부를 여전히 물들이고 있습니다. 주님, 이 사순의 시절 내가 하느님보다 더 잘 안다는 우리의 교만함을 내려놓게 하소서. 우리의 영적 무지함을 용서하소서.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게 하소서. 우리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님,
주께서 오래전 걸으셨던 그 여정을 따라 우리도 하루 하루 걷습니다. 주께서 직면하셨던 당신의 백성들의 고통과 망각, 그리고 악의 굴레를 마주합니다. 그 낡고 오래된 질서는 우리 신앙의 일부를 여전히 물들이고 있습니다. 주님, 이 사순의 시절 우리의 낡은 관습과 기억 그리고 올바름과 거룩함에 대한 우리의 옛 신앙을 내려 놓게 하소서. 부활하신 예수를 소망으로 삼고 고난 당하신 예수와 함께 우리 일상 속 성소를 만나는 기쁨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게 하소서. 우리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님
이 사순의 시기,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심을, 우리는 그 분의 처소임을, 그리고 그 처소는 기도하는 집임을 다시 한 번 고백하게 하소서. 그간 우리는 몸과 영을 분리시키고 세속과 거룩의 두 세계를 살아왔습니다. 이제 40일의 영적 순례의 길을 나서며 그 오랜 습관의 끈을 끊습니다. 우리 삶이 기도로 다시 세워지도록 우리 삶이 온전히 주께 영광돌리도록 선하신 은총으로 우리를 이끄소서. 2천년 전 성전을 정화하시고, 또 지금 우리 인생을 정화하시는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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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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