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없는 시대"라고 한탄하는 소리에 가끔 마주합니다. 왜정시절부터 독재 시대에 이르기까지 기나긴 고통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급부로 우리는 유영모, 함석헌, 김흥호, 문익환, 장준하, 김대중, 홍근수와 같은 어른들이 펼쳐 놓는 시대를 꿰뚫는 메시지를 위안삼아 지내왔습니다.
어른이 없다는 하소연은 몇년 전, 신영복 선생이 서거하고나서 파도치며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것 같습니다. 그때 저는 뉴저지의 한국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한 사람이 죽으면, 유작을 구하고자 줄서서 대기하는 사람들의 경향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유욕이든 고인에 대한 예의든 무엇이든간에요. 여기저기 구석에 숨어 있던 그의 책들은 마침내 주인을 만나려 먼지를 털어냅니다. 지난 월요일은 신영복 선생의 서거 2주기였습니다. 사람들은 함께 모여 고인이 생전에 애창했던 노래를 불렀습니다. "시냇물"이라는 노래입니다. 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강물 따라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강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저는 렉시오 디비나 묵상법을 응용하여 이 노랫가사를 응시해 봤습니다. "따라가고 싶어", "보고 싶어"라는 단어가 입을 맴돕니다. '나를 따르라'던 예수의 메시지는 알수 없는 힘이 되어 내 마음을 끌어 냅니다. 아니, 내 마음을 낚습니다. 그래서 나는 가고 싶어 갑니다. 어느새 시냇물이었던 나는 강물이 되어 있습니다. 강물이 된 나는 더 넓은, 더 낮은 곳에 대한 호기심이 생깁니다. 그때부터는 따라가는게 아니라 보고 싶은 마음에 더하여 강물에 몸을 맡겨버립니다. 어느새 강물이었던 나는 바다가 됩니다. 신영복 선생은 "바다는 변화와 소통의 최고 형태"라 합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휘호를 받습니다. 이것이 영광입니다. 어른은 딴데 있지 않았고, 되어가는 방법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시끌벅적한 연말이 지나가고, 정초가 되었습니다. '새 해'가 갖고 있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습니다. 홀연히 몸과 마음을 추스르게 합니다.
그래서 1월에는 영성 강좌로 오후 프로그램을 준비했습니다. 성서 읽기나 떼제의 찬양과 침묵, 매일 기도에 관련된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뭔가 산 속에서 수도자가 나타나서 가르쳐야 할 내용 같지만, 마음의 심연에 다다르는데 필요한 건 방향입니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그 길을 따르고자 할 때, 올바른 이정표와 길 안내자가 있다면 고마운 일입니다. 저는 고맙게도 길 안내자를 만났습니다. 한 스승 목사님을 모시고 10년간 공부한 아내를 만나고 서서히 인생의 방향이 정리되었습니다. 고정된 나침반은 고장난 것이라고 하지요? 살아 있는 나침반의 끝은 떨리기 마련이지만, 거즘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방향을 쉽게 말하자면, 심층 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강남 교수의 표현을 빌자면, 그는 표층 종교와 심층 종교를 말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므로 심층 그리스도교에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구 표면 어딘가에 각자 살지만, 중심을 향해 가면 핵심에 다다르는 것처럼 그리스도교의 모양으로, 또 크게 개신교와 가톨릭과 정교회로 대륙처럼 나뉘어지더라도, UCC와 장로교와 감리교처럼 State로 나눠지더라도, 중심에 이르르면 우리가 꾸며낸 것이 아닌, "날 것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사람이 뭉치면 삶이 되고, 삶이 터지면 사람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스승으로 삼는 김흥호 선생의 말입니다. 애벌레가 뭉쳐서 고치가 되고, 고치가 터져서 나비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진리와 자유를 말합니다. 진리를 향해 뭉치고 뭉쳐서 무한대의 밀도를 가질 때, 마치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특이점Singularity처럼 어느 순간 터져 새로운 자유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앞의 사람은 뒤의 사람과 확연히 다를 것입니다. 변화의 1월을 함께 누리시기 바랍니다. 까닭 없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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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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