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주일 공동기도
주님, 우리 마음을 깨워 주소서. 당신의 정한 목적을 위해 항상 깨어 있게 하시고, 항상 새롭게 하소서. 주님,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 주일로 모였습니다. 그저 5백년 전에 일어났던 한 사건으로 보지 않고 우리 신앙과 생활을 다시 돌아봅니다. 한 시대를 마무리 짓고 새 시대를 여시는 당신의 뜻을 분별하게 하소서. 오늘도 일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게 하소서. 주님은 지금도 말씀하고 계심을 믿사오니,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 개혁에 응답함으로, 심장이 뛰며 혈액이 도는 생명의 공동체 되게 하소서.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시대에 어른이 없다고 합니다. 왜 그 많던 어른이 없어졌을까? 생각을 해봤습니다. 모든 것이 공개된 투명사회를 살아가면서 어른 행세하는게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게 된 것도 한 몫 하게 됐습니다.
저는 좀 생각이 다릅니다. 완벽한 사람은 없기에 저는 저와 성향이 다른 목회자들도 존경할 부분을 만나면 반갑습니다. 한 사람을 스승으로, 어른으로 모시기는 어렵지만, 부분이 모여 집단을 이룬, 영혼의 스승은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에 어른이 없다는 말은 방향을 제시해주고, 리더가 되실만한 그릇이 되는 분이 없다는 뜻도 있겠지만, 어쩌면 우리 혼에 대고 소리쳐 주시는 분, 혼을 내주시는 분이 없다는 말입니다. 간디, 만델라, 마틴 루터 킹 같은 분들이 우리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맥이 끊겼습니다. 그런데 지난 18일 연세대학의 유동식 교수님이 향년 100세를 일기로 소천하시면서 깨달았습니다. 어른이 없는 게 아니라 찾지 않는 시대구나. 우리 교회 설립 목회자이신 유철옥 목사님과 보스턴대학 동문이시면서 지난 80년대에 두 차례나 오셔서 강단에 서셨습니다. 교회역사를 정리하면서, 키가 훌쩍 크신 그 모습을 사진으로 뵙고, 빳빳한 바짓단에 무척 멋있고 인상깊었습니다. 문득 거의 30년 전 배우고 은혜받았던 풍류도 신학을 돌아봤습니다. 유교수님은 최근 K-culture를 보고도 우리 민족만의 풍류가 작동하는 증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교가 한국에 들어와도 한국적 불교가 되고, 유교가 한국에 들어와도 한국적 유교가 되듯이 그리스도교도 한국적 풍류로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을 보내면서 특별히 집에서 온라인 성찬을 하면서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깨달음이 왔습니다. 남의 소리 듣고 은혜받는 신앙생활이 아닌, 내 신앙, 내 성경, 내 성찬은 무엇인지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안의 풍류와 더불어 빚어질 새 술을 담을 새 부대를 마련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올 한해 마지막이 될 지 모를 고추를 땄습니다. 심기만 했을 뿐인데 기르시는 분은 하느님이심을 다시 절감합니다. 우리는 거두기만 할 뿐입니다.
사실, 작년에는 고추가 무엇인지 심고나서 공부를 했습니다. 줄도 삐뚤빼뚤 엉망이었고, 간격도 너무 좁았습니다. 한 군데 몰아놓는 바람에 고추 한 번 따려면 나무와 나무 사이를 헤집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래도 ‘초심자의 행운’ 같은게 작용했으려나요? 수확이 참 좋았습니다. 그래서 고추는 그냥 원래 잘 자라는 줄 알았습니다. 올 해는 조금 더 야심차게 고추 농사를 지었습니다. 모종도 더 준비하고, 각을 맞추어 딱부러지게 줄을 세웠습니다. 간격도 제딴에는 널찍하게 잡았습니다. 편하게 수확할 수 있도록 일렬로 세웠습니다. 나무가 상할 일이 없도록 말입니다. 다 해놓고 나니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과연 수확이 좋았을까요? 이상하게 반토막이 났습니다. 똑같이 자연농을 했고, 더 바람도 잘 통했고, 초보 농사꾼이 아니라 제대로 된 밭에 태어난 ‘금수저’ 고추나무 대접을 잘 해줬는데도 결과는 제 생각과 달랐습니다. 스포츠에는 2년차 징크스라는 게 있습니다. 1년차에 신인왕에 가까웠던 훌륭한 선수들이 2년차에 더 잘하려고 단점을 보완하다 보니 원래 있던 장점을 잃어버린 결과입니다. 햇살을 내리시고, 바람을 보내시고, 비를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신데, 제가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눈이 멀었습니다. 2년차 실패의 원인 분석을 위해 좀 찾아보니 사실, 이 정도도 할렐루야였습니다. 몇몇 농부들이 고추는 절대 비료 없이 키울 수 없다고들 하소연합니다. 내가 한 일이 아닌 것에 괜히 기대치만 높아졌지, 이 정도만 해도 실상 감지덕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수 농부들은 감사하나 봅니다. 하늘을 바라보나 봅니다. 오늘도 초보 텃밭지기는 인생 농사를 여러해 지어 보신 선배님들에게 한 수 배웁니다. 무엇보다 하느님만 바라봐야 함을요. 여러분 가운데는 미리 연습삼아 쓰셨든 실제로 쓰셨든 유언을 써보신 분들이 있으실겁니다. 아직 안 써보신 분들은 한 번 써보시면 좋겠습니다. 유언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물질적 유산이 있고, 영적 유언이 있습니다. 유산의 분배는 생각처럼 어렵지 않을겁니다. 좀 어렵다 싶으면 도와주는 변호사와 같은 전문가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유언은 생각처럼 쉽지 않을겁니다. 인생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깨달음을 단기간에, 단지 몇 줄로 정리한다는 것이 수십년의 역사를 살아온 장본인으로써 아쉬움을 남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을 바꿔보시는 방법도 있습니다. 유명한 사람일수록 유언이 짧습니다. ‘유명’이라는 것이 그만큼 사람들에게 이름이 알려졌다는 뜻이기 때문에, 반대로 그 본인도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나봐서, 인간의 속성을 잘 알도록 돼 있습니다. 그들 유명인들은 사람들이 남의 말을 길게 기억하리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왔다가 가노라", 혹은 "나 물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가노라" 이런 류의 말 한마디를 남기기도 합니다. 또 제가 좋아하는 버나드 쇼가 남긴 유언은 가장 잘 알려진 유언 중 하나입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줄 알았지.. “.이렇게 말 한 마디로 자신의 생을 정리하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말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중에서 칼 마르크스의 말이 인상적입니다. "마지막 말이란 충분히 얘기하지 못한 바보들이나 하는 거야." 살아 생전에 할 말을 장대하게 하고 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바울이 이런 부류에 속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바울은 얼굴이 잘 생기고, 가문의 재력이 뒷받침 되며, 대중 앞에서 말을 잘하는 그런 류의 사람은 아니었을거라는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합니다. 실제로 바울은 독신에, 지병도 갖고 있었고, 스스로 생계를 연명했으며, 때로 많은 교회 공동체에게 후원을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서 스물 일곱 권 가운데 거의 절반 가까운 열 세 권이 바울의 편지라는데서 알 수 있듯이, 살아 생전에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할 수 있는 말은 글로 전부 남겨 놓았습니다. 이렇게 바울이 편지로 남긴 유산이 있었기에 초기 기독교가 숱한 이단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바울의 유산이 목회적으로 집약된 디모데후서를 오늘부터 함께 나눌 때에, 그의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을 영적 사도의 마음으로 함께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
아카이브
4월 2023
카테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