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에 비가 오면 부자로 산다는 덕담을 새롭게 알게 됐습니다. 어제 결혼식에 비가 많이 왔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신랑 신부와 멋진 피로연장, 맛있는 요리가 일품이었습니다. 우리 교회 식구들을 위해 한 테이블을 만들어주신 조 권사님 덕택에 단체 사진도 찍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멋지게 차려 입고 비를 쫄딱 맞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원래 우산 없이 비 맞는 것을 좋아합니다. 젖은 상의를 벗고 운전을 하다보니 뽀송뽀송해지는게 기분이 좋았습니다. 어린 시절 장맛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저를 포함해서 동네 꼬마녀석들이 우리 집 앞에 모여 비를 한 참 맞으며 이름 없는 몸부림을 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비 맞는게 좋았던 이유는, 아마도 집에 가서 깨끗한 수건으로 물기를 닦는 따스함에 연원한 것이겠지요. 새 옷을 입고, 따뜻한 코코아 한 잔을 마시면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습니다. 두 주일 안에 가까운 분들의 관혼상제를 가까이서 지켜봅니다. 서글픈 장례식, 신나는 결혼식, 그리고 다음 주에는 세례식이 이어집니다. 프랑스 인류학자 아놀드 반 겐넵은 이같은 의식이 모든 사회에 두루 존재함을 밝히고, 통과의례라고 이름붙였습니다. 이 통과 의례라는 것들이 시간의 순서대로 치면 죽음을 향해 한 단계씩 문을 통과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본향을 향해 가는 성도 입장에서는 새롭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뒤로 하고 한 단계씩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비를 맞은 옷을 벗어버리고 뽀송뽀송함을 귀히 여기듯이 말입니다. 모든 통과의례는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옛 자아는 버려야 합니다. 성인식을 했는데 아이로 살면 안됩니다. 결혼식을 했는데 싱글처럼 살면 안됩니다. 중요한 관문을 통과했으면 다음 단계에 맞는 신분으로 감격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제자들을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
곁에 둘러 앉히시고 이렇게 가르치셨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옳은 일에 주린 사람은 행복하다. 박해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고통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에서 보상이 크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말했다. “그 말씀을 글로 적어 놓으리까?” 그리고 안드레아가 말했다. “그 말씀을 잘 새겨 둬야 할까요?” 그러자 야고보가 말했다. “그걸 갖고 우리끼리 시험을 쳐 볼까요?” 그리고 빌립보가 말했다. “우리가 그 뜻을 잘 모를 경우에는 어떻게 할까요?” 그리고 바돌로매가 말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줘야 할까요?” 그러자 요한이 말했다. “다른 제자들한테 알려줄 필요가 있을까요?” 그러자 마태오가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언제 떠날건가요?” 그리고 유다가 말했다. “그 말씀이 실생활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요?” 그리고 그 자리에 참석했던 바리새인 하나가 예수에게 수업 계획서를 보여 줄 것을 요청하면서 그 가르침의 최종적인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우셨다. -작자 미상 부모님들은 아이들을 위해 평생 얼마나 잘 먹이고, 입히고, 놀리고 얼마나 헌신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그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어린시절의 상처를 찾아냅니다.
선명하게 상처의 흔적을 남기는 것은 결핍이고, 상처로 남습니다. 계속 잘해주다가 한 번 공백이 있을 때, 그 때가 기억납니다. 제가 초등학교(국민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부모님이 교회 개척을 하셨습니다. 저에게 따라붙는 말은 늘 개척교회 목사 아들이라는 표현이었습니다. 하여튼 배고픈 시절 아니었겠습니까? 부모님과 함께 할머니 댁에 왔다가, 저만 남겨지는 경험은 슬픈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양쪽 할머니 댁에서 한동안 살았던 기억이 있어요. 나중에 성인이 돼서 확인해 보니까, 그 길었던 할머니댁에서의 시간이 사실 1주일, 3일 이랬던 거였는데, 저는 한 몇 개월씩 살았던 것처럼 느꼈습니다. 당시, 밤이 얼마나 길었는지 모릅니다. 할머니 방 구석에 쌀독이 있었는데, 어느날 그 쌀독이 제 비밀장소가 돼있었습니다. 쌀독 주변에 떨어진 쌀을 간식삼아 먹는 척 하며, 웅크리고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선명하게 기억하는 어린시절의 상처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나중에 목회상담학 수업을 들으면서 집단상담과 연구 논문을 통해 헤아려 보기 시작하니까, 우리 부모님 같은 분들이 안계신거에요. 지금도 생각해 보면, 지금의 저보다 훨씬 나은 분들입니다. 깨닫고 나니 저를 얼마나 애지중지 키워주셨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위인전기에만 나오는, 어린 시절 유복한 시절을 보냈던 사람이 저였습니다. 깨달음은 상처와 고통을 관통하고 만나는 것인가 봅니다. 지난 주일에 세계성만찬주일 연합예배를 성료하였습니다. 함께 동참해주시고, 위해서 기도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먼저 코로나 시대를 돌파하며, 2년만에 대면으로 연합예배를 회복했다는 점이 의미 깊었습니다. 이로써 두 교회는 4년 연속으로 연합예배를 지속했습니다. 2018년부터 시작된 연합예배는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 가을에 목회자 교류와 온라인으로 연합예배를 이어나갔고, 올해 대면으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또 현실에 맞게 하이브리드로 준비할 수 있었다는 점도 하나의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연합이기에 숫자가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혹시 모를 감염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실내에서의 찬양은 지양하고, 앞마당에서 실컷 찬양할 수 있도록 디자인한 점이 참 좋았습니다. 비가 올 경우를 대비해서 플랜 B를 마련했지만, 스캇목사와 함께 날씨를 위해 기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순서가 간결해져서 헌금위원 등 예배 순서자 참여는 다소 줄었지만, 성찬을 두 교회, 세 목회자가 집례하는 등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정 장로님의 짧고 유쾌한 안내 및 환영의 말씀, 그리고 이 장로님이 한/영으로 준비해주신 성서 봉독 등 맡으신 모든 순서가 매끄러웠습니다. 제가 선포한 메시지에 몇 분 피드백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느리게 운전하는 관계로 비슷한 일을 겪으신 시니어 분들과 인종 문제에 관심있으신 분들이 공감해 주셨고, 사회적 소수자인 한 분은 지난 목요일에 사무실로 찾아와 감사 인사를 전해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음식준비가 없어서, 일찍 끝나서 휴식같은 한 주였습니다. 스캇 목사는 한국음식을 무척 아쉬워하며 내년을 기약했습니다. 그저 준비의 부담 없이 오롯이 성찬의 의미를 소박하게 되새긴 것으로 감사한 하루였습니다. 모두 수고해 주시고, 격려해 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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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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