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에 매 달 하나씩 한국 미니시리즈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떠들썩했던 오징어게임 뿐만 아니라 모두 수작입니다. 올라올 때마다 전세계 10위권 안에 오르내리고, 때로 1등을 달릴 때도 있으니 세월이 참 많이 달라졌습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한국드라마의 11월 작품은 <지옥>이라는 무서운 제목을 달고 올라왔습니다. 제목과 달리 그렇게 무서운 작품은 아닙니다. 종교와 사회에 대한 시사점을 재미와 함께 던져주는 작품입니다. 세상 가운데 어떻게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리뷰라도 한 번 보시면 좋겠습니다. 드라마의 기본 구성은 이렇습니다. 죄인이 천사의 고지를 받습니다. 마리아가 수태고지를 받을 때나, 전기세 고지서 할 때의 고지와도 같습니다. 무슨 날짜 몇 시 몇 분에 지옥에 간다는 고지입니다. 그러면 해당 날짜에 사자가 와서 불로 태워 처형합니다. 노파심에 말씀드리면 픽션입니다. 이러한 고지 사태에 힘입어 새진리회라는 사이비 종교단체가 떠오릅니다. 죄를 중단하고 더 정의로워야 한다는 신의 <의도>를 전달합니다. 문제는 새진리회의 의장도 고지를 받고 처형당했다는 사실인데, 이를 은폐합니다. 정의는 의장의 죽음을 위해 사용된 거짓 홍보 수단입니다. 3일된 신생아까지 고지를 받게 되자, 이를 재차 은폐하고자 폭력을 사용하는 모습까지 보입니다. 코로나 이후 단절된 것이 무엇인가 곰곰히 생각해 보다가, 이 드라마의 주제 의식과 만났습니다. 기성 종교의 탈을 쓴 사이비들은 죄를 지어서 자연재해를 당한다며 낙후된 나라들을 비방했습니다. 코로나 이후 미국대통령도 감염되고, 가족 친지, 본인까지 감염되고 나니 더 이상 재해가 죄의 결과라는 이야기는 누구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수박 껍데기만 핥는 표층종교, 정의의 수단으로 공포를 일삼는 종교는 사이비와 더 가깝습니다. 이제는 구원의 본질에 더 깊이 다가가야 할 때입니다. 어느날 플러머와 변호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변호사가 <이봐요, 시간당 2백불은 좀 너무한 것 아닙니까? 나는 변호사인데도 그렇게는 못 벌어요>라고 따졌습니다. 플러머가 대답합니다. <나도 변호사였을 땐 그렇게는 못 벌었죠>
플러머, 변호사, 사업가, 성직자 내가 입고 있는 직업의 옷이 무엇이 되든지 그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나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직업은 옷을 갈아입는 것 뿐입니다. 설겆이만 하려고 해도 앞치마를 두르는게 한결 낫듯이, 그 일에 적합한 복장을 갖추는 것 뿐, 그게 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껍데기 안에 있는 속 살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데, 우리가 입고 있는 옷과 타고 다니는 차와 살고 있는 건물이 동원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영화를 잘 보고 눈물을 흘리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나오고 보니까 모두 커플입니다. 순간 쓸쓸합니다. 나만 친구가 없구나. 난 정말 불행하구나.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억지로 불행을 쥐어 짜낼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친구들 집에는 컬러 티비가 있었습니다. 우리집에는 흑백 티비 밖에 없었지만 그 사실이 저를 불행하게 하진 않았습니다. 왜냐면 뭘 몰라서 그랬지요. 어린아이와 같아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이 다른 게 아니지요. 갈등과 원망과 짜증… 모두 어른들의 것입니다. 모두 비교에서 나옵니다. 존재와 자신을 일치시키지 못하는데서 나오는 불행입니다. 들에 핀 백합화나 공중 나는 새에게서 발견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원래부터 감사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조화롭게 살아가도록 세상을 창조하셨고, 기쁨을 충만히 누리는 존재로 만드셨음을 기억하며 범사에 감사합시다. 겨울입니다. 공동구매가 시작됩니다. 싱글맘들을 우리는 마음에 품었습니다. 몇 해동안 공동구매를 통해 수익금으로 렌트비를 지원했습니다. 어느덧 수익금보다 후원금이 더 많아졌습니다.
대부분 규모가 크지 않은 교회들이 참여합니다. 또 교회는 다니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정신을 존중하는 길벗들이 참 많습니다. 지금은 뉴욕 뉴저지 시카고 텍사스까지 연 8만불 이상의 싱글맘을 향한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킵니다. 이번 공동구매를 준비하던 중 우연히 김소연 시인의 <마음 사전>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동정은 행동으로 표출되고 연민은 마음으로 표출된다. 동정보다 연민 때문에 우리는 더 마음이 아프고 마음이 묶인다. 마음이 묶여버려서 연민은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동정하는 사람은 타자를 통해 내 자신은 그것을 이미 갖고 있거나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자긍심을 느낀다면, 연민하는 사람은 타자를 통해 내 자신도 그것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결핍감을 느낀다. 요컨대 동정은 이질감을 은연중에 과시한다면 연민은 동질감을 사무치게 형상화한다. 물에 빠진 사람을 동정한다면 119 구조대를 부를 테지만, 물에 빠진 사람을 연민한다면 우리는 팔을 뻗어 손을 내밀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참 새로운 시각이지요? 예전에는 불우이웃돕기라는 말을 썼습니다. 불쌍한 사람들을 배경삼아 사진 찍어 자랑도 했었던 과거가 있습니다. 이제는 조금씩 이질감 어린 <동정>을 뒤로 하고 동질감에 기반한 <연민>을 배워가는 모양새입니다. 이 글을 접하고 나는 <동정>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무엇이든 일단 좋습니다. 동정은 나름대로 행동력이 있고, 연민은 서로 깊이 연결되니까요. 모쪼록 신나는 협동조합의 사역에 마음을 모아주셔서 올 해도 다시 한 번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유아 세례 예식을 준비하면서
아이야, 너를 위하여 예수께서 오시어, 사셨고, 고난을 받으셨단다. 너를 위하여 그 분께서는 죽음을 이기셨단다. 너를 위하여 그 분께서는 하나님의 오른 편에서 기도하신단다. 아이야, 네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지라도 그 분께서는 너를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행하신단다. 세례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라는 사도의 말이 이루어진단다. 주님께서 너에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켜주시며, 주님께서 너를 밝은 얼굴로 대하시고 너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님께서 너를 고이 보시어 너에게 평화 주시기를 빈다. 부모는 너를 위해서 사랑과 신뢰의 가정을 꾸려나가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본이 되며, 그리스도의 친교 안에 자라는 믿음의 자녀로 자라도록 다짐한단다. 교회 공동체는 너를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의 공동체로서 믿음으로 서로를 양육하고 기도로 서로를 지탱하며 섬김으로 서로를 격려하며 살아갈 거란다. 목사님은 네가 늘 빛의 아이로 걸어가기를 빈다. 네 착한 행실을 세상이 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기원한다. 모두의 마음을 담아 축하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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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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