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어렸을 때, 사택이 교회와 붙어 있었습니다. 교회 김치라도 담으려면 우리집 부엌과 거실을 내어줘야 했지요. 주일 점심이면 어린이부 교사들이 우리집에서 상을 여러개 펴고 왁자지껄 라면 파티를 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생활과 가정 생활이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교회절기가 우리집 절기였습니다.
당시 저는 계란을 좋아하는 소년이었습니다. 부활절에 유난히 신났습니다. 삶다가 깨진 것도 먹고, 그냥도 먹고, 꾸미고 난 다음에도 먹었습니다. 그러나 공짜는 아니었습니다. 밤새도록 꾸미는 것도 여신도들과 함께 우리 가정의 몫이었습니다. 부활절 분위기로 교회도 꾸며야 했습니다. 훗날 전도사, 목사가 돼도 같은 일은 계속됐습니다. 이렇게 평생을 교회 절기와 가까이 지낸 저도, 적응이 안되는 날이 하루 있습니다. 바로 부활절 전날입니다. 교회력으로는 성 토요일이라고 합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시고, 부활절 새벽까지의 '신의 침묵'의 시간입니다. 고요한 날이지요. 그런데 사람의 감정은 그렇게 쉽게 차분해지지 않습니다. 성금요일까지의 그 슬픔과 절망의 감정이 남아 있고, 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러 가는 두 제자의 달음박질처럼 벅찬 소망을 예비하는 날입니다. 묘한 감정이 서로 교차되는 가운데, 그 둘 중 어느 하나도 아닌 고요함에 머물러야 하는 미션이 주어지는 날입니다. 이번 한 주간은 성 주간 Holy Week이라고 합니다. 성 주간을 맞이하는 기본 마음가짐이 바로 이러한 고요함입니다. 사순절기동안 요란함을 피하고, 절제와 침묵으로 순례길을 걸어오셨다면 참 잘하셨습니다. 성주간에는 지난 6주간의 말씀,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을 묵상하시면서 고요히 주의 행적을 지켜봅시다. 여러 감정들이 교차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가고자 하는 예수의 길을 지켜 보호하실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그 고요한 아침의 적막을 깨고 돌문이 열리는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실 것입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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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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