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참 좋습니다. 그래서 미뤄왔던 화분을 만들었습니다. 아빠가 하는게 재미있어 보였는지, 학교 수업 대신 진행하는 온라인수업에 몰두해야 할 아이들이 후다닥 발코니로 뛰어나옵니다. 잘 됐습니다. 저는 졸지에 머슴에서 관리자로 올라섰습니다.
재밌어 보여봤자 일은 일입니다. 아이들의 손놀림이 영 시원찮습니다. 결국 뒤치다꺼리 하느라 힘 다 뺍니다. 관리자로 승진했다고 목에 힘 좀 줬는데, 부질없는 짓이었습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목에 힘 빼 그래야 살아”라는 메시지가 날 보고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수영장에 가면 몸에 힘을 빼야 물에 뜰 수 있듯이, 모든 운동을 할 때는 몸에 힘을 빼야 다치지 않고 효과를 보듯이 힘은 뭘 모르는 사람들이 주는 겁니다. 완장이라는 것도 차 본 사람이 능수능란하지, 처음 찬 사람은 으스대기만 할 뿐 실속이 없습니다. 4주째 교회 문을 닫았습니다. 각자 집에서 가정예배를 드리고 계실 겁니다. 여기에 인터넷이 되는 분들은 온라인 함께 드리고 있습니다. (Netflix가 되는 TV가 있으면 YouTube에서 우리 교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배 실황을 레코딩 하는 것도 처음이라 힘이 많이 들어갑니다. 사람이 커졌다 작아졌다, 소리가 잘들렸다 안들렸다 속상한 마음에 몸은 긴장을 늦추지 못합니다. 몇 주 지나니, 그 마음 밑바닥에는 욕심이 숨어 있었음을 알아차립니다. 힘이 들어가는 이유는 뭔가 잘해보려고 하기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제 성향을 돌아봅니다. 처음 해봤어도 건성건성 할 수가 없어서 밤을 샙니다. 화분을 단장하며 멍하니 생각하는 동안 다시 아이들이 질문 공세를 폅니다. “씨앗이 왜 죽어야 하냐”며 슬퍼합니다. 이 깊은 사연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사실 사물의 죽음과 부활은 아이들 입장에선 자연스럽지요. 자연은 늘 죽고 부활하는데, 아이들은 그걸 여과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니까요. 누군가 그러더군요. 나무에 순이 돋는 자리는 겨우내 눈과 비와 바람을 맞아가며 상처난 곳이라고. 우리의 아픔과 불안, 그리고 상처는 희망의 새 순이 돋아날 자리일 겁니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나시 나게 하시는(고린도전서 15장) 부활의 신비는 우리 가까이 있습니다. 슬픔을 넘어 비탄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오늘, 이 역설적인 부활의 아침에도 주님은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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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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