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어쩌면 때를 잘 만난 사람입니다. 때마침 인쇄술이 발명되어 사람이 수 천일 동안 해야 할 일을 기계로 하루만에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종교개혁의 시작은 루터 150년 전 위클리프로 거슬러 올라갑니다만, 플랫폼이 준비되어 있지 않던 시절에 개혁을 외쳤기에, 앞선자들은 이단 판정과 부관참시만 당했을 뿐이었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사도 바울도 때를 잘 만난 사람입니다. 당시 로마가 세계 전역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려고 도로를 잘 닦아 놓고, 그에 걸맞는 치안을 유지해 놓았기 때문에 역사적인 복음전파자 가 되었습니다. 이전 사람들은 옆 나라만 가려고 해도 수 개월을 투자해야 했고, 위험이 뒤따랐는데, 바울은 세 번이나 선교 여행을 무사히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루터보다 더 안전하게 신앙생활을 하거나, 바울보다 더 쉽게 세계 곳곳을 찾아 선교할 수 있습니다. 참 좋은 때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런 시절을 뒤로하고 조금 불편하게 살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에 모이고 싶어도 모일 수 없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정성 가득하고 풍성했던 주일 친교는 당분간 언감생심입니다. 또, 여행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항공사는 파산하고 있으며, 개인의 자유로운 여행은 상당한 의료적 검증 절차를 요구하는 것으로 바뀔 것입니다. 새로운 질서가 오고 있습니다. 뉴 노멀의 시대를 준비할 때입니다. 300년 전의 동일 직업인이 오늘날 부활해서 사진만으로 자신의 일터를 알아볼 수 있는 경우를 일컬어 변함이 없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1700년대 학교 선생님에게 교실 사진을 보여줍니다. 그는 단번에 교실이라고 외칠 것입니다. 교회로 대입해 보면 어떨까요? 무려 천 년전의 사진을 보여줘도 그 성직자는 맞출 것입니다. 학교와 교회는 시대의 흐름과 변함없는 진리를 담지하는 기관입니다. 시대정신에 따라 방법과 환경은 달라질 수 있고, 필요성은 제기되었지만, 꼭 변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에 쫓기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다른 환경에 서 있습니다. 함석헌이 오래전 말한 새 나라는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 인류는 죽음에 직면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문제는 죽음의 관문을 먼저 뚫는 한 놈이 있어서만 풀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낡은 시대의 철학, 종교에 마비된 마음을 씻어서 우리 속에 스스로 밝아진 새 종교, 새 철학으로 말을 하면 그 순간에 이 세계가 죽는 동시에 그 좁은 문 저쪽에 이때까지 알지도 못했던 새 나라가 열릴 것입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함석헌>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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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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