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기사 제목에 “예배가 회복됐다"는 표현이 있어서 설마 하고 봤더니, 현장 예배를 재개한 것에 대한 기쁨을 표현한 문장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온라인 예배는 반쪽짜리 예배로 생각될 수 있겠구나’ 하고 이해하고 싶었지만, 하나님이 온전하지 않은 예배를 받으실 분인가? 하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수천 만명이 온라인으로 은혜를 받고, 감사를 고백하고 있는 오늘에 현실에, 회복이라는 단어는 사려깊지 못한 선택입니다.
성서에서 거룩함을 표현하는 단위는 시간입니다. 예수께서는 거룩한 때를 말하고, 거룩한 장소를 말하지 않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물음에도 예수께서는 이산에서도, 저산에서도 아니고, 예배할 때가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시간보다 장소를 중히 여기셨다면, 창세기 1장은 날짜별로 일하신 하나님을 묘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상상력을 더해서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태초에 천지를" 이렇게 시작하는 대신, “천지를 창조하시니, 아프리카를 먼저 만드셨더라. 그 다음날은 유럽과 아시아를, 그 다음날은 아메리카를, 그리고 오세아니아를 만들고 쉬셨더라” 신학자 아브라함 헤셀은 이렇게 말합니다."모든 범신론적인 종교는 공간과 성소의 종교인데 반해, 이스라엘의 신앙은 시간에 관련된다.” 선지자들이 여호와의 집으로 돌아오라 말하지 않고, 여호와의 날을 예언한 것이 그 근거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요엘 1:15),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다 (스바냐 1:14, 오바댜1:15),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아모스 5:21) 그럼에도 시편 기자는 "주의 성전에서 보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천 날을 지내는 것보다 낫다"(84:10)고 고백합니다. 그만큼 그리스도교가 시간의 종교라 하더라도, 공간의 거룩함과 조화를 이룰 때 지상에서 천국을 맛보는 감동을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직접 만나서 드리는 예배, 예배당 예배를 더 그리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려 우리 죄를 사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간인 성전을 무너뜨리시고, 시간 개념인 교회를 세우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가 말하는 주의 성전은 곧 사마리아 여인이 찾던 이 산에도, 저 산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가 예배 드리는 시간이 바로 예배의 처소요, 성전입니다. 우리는 8월 한 달간 더 온라인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돌립니다. 예배의 회복은 어쩌면, 어느샌가 시작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소망하다 보니, 장소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가 예배의 자리임을 우후죽순 자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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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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