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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상상속의 라헬, 깨어보니 레아(믿음의 새길 시리즈 7)
설교자: 노용환 목사 Rev. Yonghwan Noh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세계 거짓말 대회에서 1등을 한 사람의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보통 하나의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서 일곱의 거짓말이 필요하다고 하지요. 거짓말은 슬프게도 생후 6개월부터 시작합니다. 본능에 가까운 거지요. 어른들은 더합니다. 감정을 감추는 거짓말을 합니다. 바울사도는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쓰는 편지에서 악한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경고합니다. “그들은 날로 더 사악해져서 남을 속이기도 하고 남에게 속기도 할 것입니다.” 속이는 사람들이 잘 당하는 게 속는 일입니다. 야곱이 바로 전형적인 케이스입니다. 그토록 원했던 라헬과 결혼식을 마치고 다음날 아침 깨어보니 레아입니다. 속이던 인생은 속기 마련입니다. 야곱의 고백이 인상적입니다. “눈을 떠보니 레아였다”. 그러고 보면 눈 뜨고 나서 알아차리게 되는게 얼마나 많은지요? 임종때면 후회하는 말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까? 지나보면 허탄한 일에 화내고, 욕심내고, 열내면서 살았구나… 눈이 뜨이고 나면 고백되는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지요. 심적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누구 때문에"로 시작됩니다. 남편 때문에, 시어머니 때문에, 자식 때문에… 저마다 관계속에서 우리는 ‘라헬'상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내 아들은 반듯하게 좋은 학교, 좋은 직장을 가져야 하고… 내 남편은 가정에 충실하면서도 회사에서 승진도 잘해야 하고… 상상속의 라헬, 최고여야 하고, 이상적이어야 하는 그 ‘대상'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눈을 떴을 때, 레아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 대상들이 이상적이어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사실, 나의 부족한 면을 대상을 통해 만족시키고 싶어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어머니가 곰 같아서 불편했던 아들은, “나는 꼭 여우같은 여인과 결혼하겠어"라고 다짐하기 마련이지요.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 눈을 뜨게 하시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눈 앞의 레아와 관계하는 법, 만물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시는 은혜에 있습니다. 성서본문: 창세기 Genesis 29:15-28 15 하루는 라반이 야곱에게 물었다. "네가 내 골육이라고 해서 내 일을 거저 해서야 되겠느냐? 품삯을 얼마나 주면 좋겠는지 말해 보아라." 16 그런데 라반에게는 딸이 둘 있었다. 큰딸은 레아요, 작은딸은 라헬이었다. 17 레아는 눈매가 부드러웠지만, 라헬은 몸매도 아름답고 용모도 예뻐서 18 야곱은 라헬을 더 좋아하였다. 그래서 그는 칠 년 동안 외삼촌 일을 해드릴 터이니 작은 따님 라헬을 달라고 청하였다. 19 라반은 "다른 사람에게 주느니보다 너에게 주는 편이 낫겠다." 하면서 같이 살자고 하였다. 20 그로부터 야곱은 라헬에게 장가들 생각으로 일을 했다. 칠 년이라는 세월도 며칠밖에 안 되듯 지나갔다. 그만큼 그는 라헬을 좋아했던 것이다. 21 마침내 야곱은 라반에게 기한이 다 찼으니 라헬을 아내로 맞아 같이 살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22 그래서 라반은 그 고장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청해 놓고 잔치를 베풀었다. 23 밤이 되어 라반은 딸 레아를 야곱에게 데려다 주었다. 그것도 모르고 야곱은 그와 한자리에 들었다. 24 이 때 라반은 딸 레아에게 자기의 계집종 질바를 몸종으로 주어 거느리게 하였다. 25 아침이 되어 야곱이 눈을 떠보니 어이없게도 그것은 레아였다. 야곱은 라반에게 항의하였다. "삼촌이 저에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저는 라헬에게 장가들려고 삼촌 일을 해드린 것이 아닙니까? 왜 저를 속이시는 것입니까?" 26 라반은 "우리 고장에서는 작은딸을 큰딸보다 먼저 시집 보내는 법이 없네." 하며 부탁하였다. 27 "초례 기간 한 주일만 채우면 작은딸도 주지. 그 대신 또 칠 년 동안 내 일을 해주어야 하네." 28 야곱은 그 말대로 한 주일을 채웠다. 그제야 라반은 야곱에게 딸 라헬을 아내로 주었다. ○ 성서 봉독 | 창세기 Genesis 28:10-19 |
야곱은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을 향하여 가다가 한 곳에 이르러 밤을 지내게 되었다. 해는 이미 서산으로 넘어간 뒤였다. 그는 그 곳에서 돌을 하나 주워 베개 삼고 그 자리에 누워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다. 그는 꿈에 땅에서 하늘에 닿는 층계가 있고 그 층계를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고 있었는데, 야훼께서 그의 옆에 나타나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야훼, 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네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이다. 나는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리라. 네 후손은 땅의 티끌만큼 불어나서 동서남북으로 널리 퍼질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종족이 너와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주다가 기어이 이리로 다시 데려오리라.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어줄 때까지 나는 네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 야곱은 잠에서 깨어나 "참말 야훼께서 여기 계셨는데도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 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혀 외쳤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여기가 바로 하느님의 집이요, 하늘 문이로구나.“ 야곱은 아침 일찍 일어나 베고 자던 돌을 세워 석상을 삼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붓고는 그 곳을 베델이라 불렀다. ○ 하늘뜻펴기 | 노용환 목사 | 깨어나니 여기 계시는 벧엘의 하나님 도망자 야곱은 분명히 목적지가 하란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으로는 모릅니다. 지금 몰려들어오는 감정들을 주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형과 아버지를 속인 죄책감, 처음으로 떨어져 보는 엄마 품, 마을 바깥에 도사리는 위험함, 과연 하란에 도착할 수 있을까? 거기서는 어떤 삶이 펼쳐질까? 미래에 대한 두려움까지 엄습하는 가운데, 해는 뉘엿뉘엿 저물고 있습니다. 첫날 밤입니다. 생전 집을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은 900마일 길을 떠돌아 다니셨고, 미래의 야곱도 하란땅에서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만리 길을 순례할 사람이지만, 희안하게 아버지 이삭은 그 자리에서 머무는 사람이었습니다. 덕분에 야곱은 첫 여행부터 대책 없이 돌베게를 베고 노숙합니다. 유난히 고단했던 그날 밤, 깊은 잠에 빠진 야곱은 꿈을 꿉니다. 역사적인 꿈입니다. 꿈은 일종의 무의식의 표출입니다. 정신분석과 종교를 함께 연구한 리주토는 하나님 표상(representation)은 일차적으로 어머니 표상과 일치한다고 보았습니다. 꿈에서 만난 하나님의 말씀은 곧 어머니로부터 가장 듣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려주셨던 위대한 믿음의 가문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낯선 땅에 대한 두려움에서 위로가 절실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또한 위로가 절실했습니다. 마마보이 야곱은 그렇게 어머니를 찾지만, 정작 꿈에서는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신앙의 신비가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속이기 좋아하던 청년 야곱이 꾼 꿈은 하룻밤만에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이 되어 돌아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수로 얼룩진 삶에서 구원이 절실할 때,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관계가운데 최고 힘 센 사람을 떠올리지만, 정작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 우리 앞에 나타나 도우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꿈에서 깨어난 야곱은 이제야 깨닫습니다. 평생 어머니를 따랐지만, 이제 나와 함께 하시는 이는 다름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어나기 전에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세상의 헛된 것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깨어나면, 우리의 발목을 잡고, 우리의 성장을 저해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를 얻습니다. “참말 하나님이 여기 계셨는데도 몰랐구나!“ 깊은 내면의 고백이 뒤늦게 터져 나옵니다. 서툴고, 여전히 구습에 매여 있을지 모르지만, 언제나 시작은 그렇습니다. 그 위대한 떠남의 여정을 시작한 야곱과 더불어 믿음의 새길에 첫 발을 내디딘 여러분을 축복하며 응원합니다.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
성서 본문 | 창세기 25:19-34 1987이라는 영화를 아실겁니다. 많이들 보셨을텐데요, 여기서도 전에 총영사관을 통해 보스턴 칼리지에서 영어자막으로 상영된 적이 있어요. 장로님들이랑 함께 참석했는데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우리 교회 연혁에도 나온 고 박종철 열사 추모예배를 드렸다는 기록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그 커다란 민주화의 물결을 일으켰던 사건은 아주 작은 나비의 날갯짓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당시 중앙일보 사회부 기자의 재치가 아니었다면 영원히 감춰진 진실이 됐을 거에요. 마치 휴대폰으로 얼른 찍지 않았다면 조지 플로이드를 비롯한 흑인들의 죽음을 알 길이 없었듯이 말입니다. "경찰, 큰일났어" 알고 지내던 검사가 흘린 말에 "그러게 말입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바람에 중앙일보 기자가 특종을 건진거에요. 별 생각 없이 "무슨 일 났습니까? 뭐 아는거 있으면 얘기좀 해주세요" 이렇게 물어봤으면 아무런 대답도 얻어내지 못했을 거에요. 이럴 때,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합니다. 이렇게 아 다르고 어 다른걸 상황에 맞게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사람을 재치있는 사람이라고 해요.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한 창세기 본문에 등장하는 야곱도 그 기자 이상으로 재치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좋게 말하면 재치라고 할 수 있지만, 나쁘게 말하자면 교활하고 능구렁이 같은 인물입니다. 우리도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둘째들은 어느정도 재치가 있잖아요. 태어나면서부터 3치가 있어야 해요. 눈치, 코치, 재치 없이는 생존이 어렵다는 것을 몸으로 아는거죠.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둘째로 자라기엔 너무 억울한 둘째, 쌍둥이 둘째에요. 이름의 뜻도 "발목을 잡고 있는 자" 아닙니까? 간발의 차이로, 거의 같은 순간에 쑥쑥 나왔는데 태어나보니 둘째인 겁니다. 지금보다 제도적으로 훨씬 장남중심인 고대사회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이 더 억울한겁니다. 그 억울함을 알아줄 사람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곳에 계실 수 없어, ‘엄마’를 주셨다..는 유대인 속담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지요. 결혼한 지 20년 만에 낳은, 귀한 아들 야곱을 엄마 리브가가 얼마나 아꼈겠어요? 아들을 품에서 놔주질 않고, 주로 천막 안에서 야곱을 키웁니다. 야곱은 엄마 따라 주방일을 배웁니다. 너무 사랑해서 아들을 딸처럼 키우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 분들 심정이 이렇다고 합니다. 너무 귀해서, 너무 사랑스러워서, 여성인 나와 멀어지는 게 서운해서... 여러분, 한 가지 충격적인 사실을 고백합니다. 제가 지금은 이렇게 구릿빛으로 튼튼하게, 상남자로 자랐지만, 어렸을 때는 뽀얗고 예뻤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엄마가 삔도 꽂아서 학교 보내고, 물발라서 머리 넘겨주고 그랬던 기억이 있어요. 저도 남몰래 거울 보는 걸 즐거워했습니다. 그 심정을 저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아요. 지금 어릴 때 저랑 똑같이 생긴 은하 보면, 아 목사님이 어렸을 때 그렇게 이뻤겠구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보통 어린아이들이 우는 횟수가 영유아시기에는 비슷한데 다섯 살쯤 되면서 남자 아이들이 사회적인 압박을 받는다고 합니다. "사내자식이 뭐가 무섭다고, 남자는 평생 세 번만 울어야 돼" 이런 말, 많이 들어보시고, 해보신 분들도 있으실 겁니다. 감사하게도 저는 그런 말을 부모님께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부모님께 남자 아이라는 이유로 감정적으로 억압받지 않은게 얼마나 감사한 지 몰라요. 그래서 부작용이 드라마 같은거 보다가 시도 때도 없이 울긴 하는데, 그래도 저는 이게 좋습니다. 그렇지만 깊이 상상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경을 알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혹시 야곱인가?” 이런 상상을 하면서 자랐어요. 희안하게, 야곱처럼 집안일 하고, 여동생이랑 인형놀이하는게 좋았어요. 취미생활이 집안 식구들 장롱 정리해주는 거였어요. 그래서 지금도 야곱의 마음을 알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야곱이 겪어야 할 고통이 남 일 같지가 않아요. 그 일생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장자권의 댓가가 이런 것이었다면, 저라도 가서 말리고 싶습니다. 야곱은 실로 평탄치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삶이 얼마나 험악하고 복잡했는지 훗날 애굽 왕 파라오가 “얼마나 수를 누리셨소”라고 묻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세상을 떠돌기 벌써 백삼십 년이 됩니다. 얼마 되지는 않으나, 살아온 나날이 궂은 일뿐이었습니다.” (창세기 47:9) 여러분, 칼로 서는 자 칼로 망하고, 머리 쓰는 사람 잘 풀리는 꼴을 못보는 법입니다. 복의 근원 되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가문인데, 야곱의 인생 왜 이렇게 험악합니까? 제가 기억하는 복된 가정은 하는 일마다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며, 궁핍함 없이 베풀고 살고, 자손 대대로 타의 모범이 되는 화목한 가정입니다. 총회에서 자랑스러운 어머니상을 받은 외할머니께서 제가 어렸을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복하신 말씀입니다. 머리가 굵어진 다음부터는 외할머니가 축복 하실 시간이면, 저도 그 레파토리를 똑같이 따라하고, 할머니 안계실 때도 동생들에게도 할머니 목소리로 흉내를 내며 축복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외할머니는 그런 인생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의 생각 너머에서 일하십니다. 분명히 아브라함의 가문을 복의 근원 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건만,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건만 실상은 한 세대, 한 세대가 간당간당합니다. 쉽사리 태의 문을 열어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장자권을 동생이 뺏는 일이 생깁니다. 형은 동생보다 두 배로 상속과 축복을 받도록 되어 있었는데, 팥죽 한 그릇에 동생이 형의 장자권을 가로챕니다. 오늘 함께 읽은 성서 본문이 그 기록입니다. 당황스러운 일입니다. 재치 있다 못해 교활한 이를 왜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을까? 법과 질서를 지키지 않는 이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의문입니다. 어린 시절 제가 이해되지 않았던 인물은 특히 리브가였습니다. 왜 남편과 큰아들을 속이고, 둘째 아들을 편애했을까? 옛날 국어 선생님들이 꼭 하시던 말씀이 있어요. 문제 안에 답 있다는 말이 사실입니다. 그 해답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예언 안에 들어있었습니다. 뱃속에서 쌍둥이들이 너무 싸우니까 리브가가 하나님께 따집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리브가라는 여인이 보통내기가 아니에요. 이삭은 야훼께 기도하여 아이를 달라고 빌었는데, 리브가는 하나님께 “이렇게 괴로워서야 어디 살겠는가?” 하면서 야훼께 이유를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의 태에는 두 민족이 들어 있다. 한 부족이 다른 부족을 억누를 것인데,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 하나님 입장에서는요,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경청하는가가 기준입니다. 리브가는 따질때는 기세좋게 “대체 이 애기들은 왜그런답니까?”하고 따지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또 정확히 기억합니다.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25절)”라는 하나님의 음성, 신탁을 평생 끌어안고,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도록 실천했던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사람을 봅니다. 인물의 됨됨이와 그가 얼마나 도덕적이고, 율법적이며, 복음적인지를 판단합니다. 오늘날 신학자들이 전향적으로 재해석하는 본문이 오늘 이 본문입니다. 그동안 서구의 도덕, 서구에서 이해한 법과 질서의 잣대로 바라봤을 때, 얼마나 잘못된 일이 많았는가? 도덕이나 법, 질서가 생긴 것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극히 짧은 기간입니다. 이것도 소위 이민자들이 모여 살다 보니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기~가막힌 통치의 수단으로 발명된 것이지, 신주단지 모시듯이 할 건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금욕이나 도덕으로 풀 수 없는 문제들이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 성서가 오늘날 저와 여러분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거에요. 지난 한주간 마음을 착잡하게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서울시장으로 헌신하던 한 사람의 죽음입니다. 애도하는 마음으로 인권운동가로써, 페미니스트로써의 그의 발자취를 돌아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가 정의와 인권을 부르짖더라도, 우리가 곧 정의요, 우리 스스로가 인권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따라 그 시대에 맞게 사용되는 하나님의 선한 도구입니다. 인권을 부르짖다가 다른 이의 인권을 침해했다면 그것이 곧 죽을 일은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고 방대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습니다. 노란색도 있고, 빨간색도 있고, 파란색도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그 전체로써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를 그 전체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자신의 한 부분이 자신의 삶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설령 야곱처럼 실수하고, 교묘하게 남을 속였더라도 인생 전체를 통해 조금씩 갚아나가는게 성서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가르침이에요. 우리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의 기준으로 판가름나는 어떤 한 인물의 기질이 아니라 태도를 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태도, 당신의 약속을 귀히 간직하는 태도를 보십니다. 그러한 리브가와 그의 안내를 따르는 야곱은 마침내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고, 복의 근원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성서 인물들의 그늘진 면과 얼룩진 삶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것이 오늘날 기준으로건, 고대의 기준으로건 귀감이 되지 않더라도, 도덕적으로 완벽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성서를 통해 밝히십니다. 우리의 시선에 수평을 유지하는 한,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혹은 우리보다 못한 망나니로, 평탄한 삶을 살지 못한 인생의 실패자로 그를 이해할 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굴절 기능이 있는 안경을 우리가 쓰고 볼 수 있다면, 더 나아가 하나님의 높이에서 직접 바라볼 수 있다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성서의 세계가 열릴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펜데믹 이후 뉴노멀 시기에, 앞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걸어야 할 믿음의 새길을 함께 찾고 있습니다. 찾는 과정부터가 새로운 길이기에, 저와 여러분은 이미 믿음의 새 길을 걷고 있습니다. 우리의 길은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서에서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예비하신 길을 걷고 있는, 아브라함과 사라 가문의 믿음의 여정을 따라, 이 축복된 길을 그동안 여러분과 함께 나누면서 걷는 동안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세밀하게 우리 역사 가운데 개입하신다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향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지도 알고 계시며,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그 마음도 일일이 다 헤아리고 계시는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길 소망합니다. 우리 시선으로 봤을 때 복잡합니다. 답이 없는 현실입니다. 야곱이 살아왔던 것처럼 험악한 인생 살 것 같고, 그와 동일한 불안한 미래가 열릴 것 같습니다.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환난을 겪어야 하고, 이러한 세대를 살아가야 하는가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단순합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대로 가고 있습니다. 오직 우리가 할 것은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순종이요, 기도요, 감사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그저 우리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시길 바랍니다. 그리하면 야곱을 약속대로 연단하여 세우시고, 열조의 아비로 삼으신 우리 하나님,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줄 믿습니다. 그러한 믿음의 새 길로 힘차게 떠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하늘문을 열어주시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시는 하나님 은혜에 감사합니다. 우리 앞길 또한 어느쪽으로든 주께서 예비하셨사오니, 믿음으로 순종하며 새 길을 찾아 나서게 하여 주옵소서. 그 길에서 만나는 어떠한 어려움에도 지켜 주시고, 나날이 성장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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