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오신 날 우리는 | 이해인
예수님 어서 오십시오 비록 허물투성이의 삶일지라도 당신의 빛을 따르면 길이 열리오니 오직 당신만을 따르겠습니다. 빛을 가리는 욕심의 어둠 불신의 어둠을 몰아내고 당신의 빛 안에서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하게 해 주십시오. 당신이 사랑으로 오신 날 우리는 아직 사랑의 승리자가 되지 못한 부끄러움 그대로 안고 당신 앞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 어서 오십시오 너무 큰 사랑 앞에 드릴 말씀 없어지는 감사의 밤 늘 받기만 하고 당신께는 드릴 것이 부족한 우리의 가난함을 용서하십시오 우리의 힘만으로는 헤어날 수 없는 이기심과 무관심의 깊은 수렁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고 당신의 은총으로 우리를 보다 자유로운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어서 오십시오 예수님 우리의 별이 되신 예수 ▶대림절 공동기도 -헨리 나우엔
빛과 어둠의 주관자이신 주님, 성탄을 예비하는 우리 위에 성령을 보내주소서. 할 일이 너무 많은 우리들, 동시에 매일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조용한 공간을 찾는 우리들, 많은 일로 염려하는 우리들, 당신의 오심을 기다립니다. 많은 복을 받은 우리들, 완전한 기쁨을 갈망합니다. 마음이 무거운 우리들, 당신의 임재의 기쁨을 구합니다. 어둠 속을 걸으며 빛을 찾는 우리들은 당신의 백성입니다. 당신께 아뢰오니,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아멘. 오소서, 주님
깊은 어둠이 내려앉은 겨울 밤, 차갑게 얼어붙은 갈릴래아 땅처럼 실패와 고통의 험난한 세월을 지나가는 우리 인생 위에 빛으로 오소서. 어서 오소서, 주님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고 거짓이 참을 이길 수 없듯이 그리스도와 함께 새롭게 창조된 인생의 새벽을 맞이하게 하소서. 여기 오소서, 주님 진탕 먹고 마시며 비틀거리는 이곳, 향락과 방종으로 추한 이곳에 오시어, 우리를 빛으로 단정하게 하소서. 희망의 빛으로 오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미국 최대의 명절이라고 할 수 있는 추수감사절이 다가옵니다. 모쪼록 한 해동안 자녀와 물질과 영혼의 풍성함으로 결실을 맺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시며, 행복한 명절 보내시기 바랍니다. 크리스마스를 포함하여 다른 모든 절기는 교회력이지만, 추수감사는 신자와 비신자가 모두 함께 기뻐하는 절기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추수감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필그림의 신앙유산을 이어받은 그리스도 연합교회의 멤버로써 과연 우리는 어떤 점을 계승해야 할까요? 우선 맨 처음을 봐야겠습니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수 있었던 정신을 기억합시다. 1621년의 추수감사는 풍성함에 대한 감사가 아닌 앞으로 풍성하게 해주실 것을 믿고 드린 믿음의 감사입니다. 생존에 대한 감사입니다. 둘째로는 도움의 손길이 어디에서 왔는지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겠습니다. 도움이 손길이 되어준 이웃들에게 감사하며, 그 손길들을 움직이신, 감사의 원천되시는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풍성하게 올 한해 우리 삶을 은혜로 채워주시고, 곳간을 채워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을지라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합시다. 더불어 감사의 원천을 향해 마음을 드높입시다. 한 주간 이렇게 감사 기도를 드려봅니다. -주님, 이 시간 주님 앞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아갑니다. 지금까지 안아주시고 영혼을 씻어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제 모습 이대로를 받아주신 것처럼 저도 이웃과 만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입술의 고백을 넘어 가슴에서 일어나는 감사로 영광 받으소서. 불평과 원망과 초초가 말끔히 가신 빈 공간에서 울리는 참 감사로 영광 받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뉴저지에서 함께 성경공부하던 목사님들이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학창시절에는 은퇴하셔서 만날 수 없었던 문동환 교수님이 뉴저지에 살고 계셔서 매주 월요일 저녁에 함께 모여 창세기부터 바울서신까지 요한 계시록만 빼고 3년 반 동안 공부했습니다.
그리고는 꽤 시간이 지났습니다. 문득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 삶의 자리에 오신다면, 세상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빈틈을 찾아내시지 않겠나 생각했습니다. 함께 공부하던 목사님들도 공감해 주셨습니다. 정부도 못도와주고, 교회도 못도와주고, 이웃들도 못도와주는 일이 바로 서류미비 싱글맘 렌트비 지원사역이었습니다. 저와 우리 교회가 긴밀하게 협력하는 신나는 협동조합에서 겨울 햇김철을 맞이해서 오늘부터 공동구매를 시작합니다. 처음 공동구매를 시작할 때쯤에는, 우리 교회가 제법 큰손이었습니다. 몇 몇 작은교회 목사들끼리 모여서 힘을 합쳐봤는데, 우리만큼 힘을 모아주신 교회가 없었습니다. 어느덧 4년째 하고 있는데, 이제 우리가 큰 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게 감사한 일입니다. 일부 주력 교회들이 이끌고 가는게 아니라, 작은 개인과 가정들이 힘을 합쳐서 올 한해 2만 6천불이 넘게 싱글맘들에게 렌트비 체크를 보냈습니다. 처음에 수익금 5천불로 감격했 때가 엇그제 같은데, 이 팬데믹 어려운 시기 중에도 우리 교우님들을 비롯해서 수십 개 교회의 공동구매와 수십 명의 개인 후원자를 보내주셔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는 점이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역할이 제법 줄어들어서 감사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손길이 많아져서 감사합니다. 열 사람이 힘에 부치게 하는 것보다 수백 명이 가볍게 하는게 기쁨이자 행복입니다. 그래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참여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생산자는 공정해서, 소비자는 가장 좋은 물건을 싸게 받아서, 싱글맘은 생활에 도움이 되어서 좋은 일입니다. 일반 후원도 환영합니다! 헬렌켈러의 ‘3일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이라는 에세이가 있습니다. 1933년에 발표된 20세기 최고의 수필로 꼽히며 전 세계인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 3일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날에는 친절과 겸손과 우정으로 내 삶을 가치있게 만들어 준 사람들을 보고 싶다. 몇 시간이고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마음 속 깊이 간직하겠다. 오후가 되면 오랫동안 숲 속을 산책하면서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과 들꽃, 그리고 석양에 물든 노을을 보고 싶다. 둘째 날에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밤이 낮으로 바뀌는 가슴 떨리는 기적을 보고 싶다. 그리고는 박물관으로 가서 손끝으로만 만지던 조각품들을 보면서 인간이 진화해 온 궤적을 눈으로 볼 것이다. 저녁에는 영화나 연극을 볼 것이다. 그리고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볼 것이다. 셋째 날에는 아침 일찍 큰 길에 나가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도시 여기저기에서 그들이 활기차게 일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저녁이 되면 네온싸인 반짝이는 쇼윈도의 물건들을 볼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사흘 동안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릴 것이다. 그리고 암흑의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오늘부터 감사로 보내는 3주를 시작합니다. 14일간 감사의 기록을 남겨보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노트를 준비하였습니다. 습관처럼 기도하고 말씀 보고 감사의 마음을 글로 말로 표현해 보면 어떨까요?
종교개혁 주일 공동기도
주님, 우리 마음을 깨워 주소서. 당신의 정한 목적을 위해 항상 깨어 있게 하시고, 항상 새롭게 하소서. 주님,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 주일로 모였습니다. 그저 5백년 전에 일어났던 한 사건으로 보지 않고 우리 신앙과 생활을 다시 돌아봅니다. 한 시대를 마무리 짓고 새 시대를 여시는 당신의 뜻을 분별하게 하소서. 오늘도 일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게 하소서. 주님은 지금도 말씀하고 계심을 믿사오니,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 개혁에 응답함으로, 심장이 뛰며 혈액이 도는 생명의 공동체 되게 하소서.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시대에 어른이 없다고 합니다. 왜 그 많던 어른이 없어졌을까? 생각을 해봤습니다. 모든 것이 공개된 투명사회를 살아가면서 어른 행세하는게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게 된 것도 한 몫 하게 됐습니다.
저는 좀 생각이 다릅니다. 완벽한 사람은 없기에 저는 저와 성향이 다른 목회자들도 존경할 부분을 만나면 반갑습니다. 한 사람을 스승으로, 어른으로 모시기는 어렵지만, 부분이 모여 집단을 이룬, 영혼의 스승은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에 어른이 없다는 말은 방향을 제시해주고, 리더가 되실만한 그릇이 되는 분이 없다는 뜻도 있겠지만, 어쩌면 우리 혼에 대고 소리쳐 주시는 분, 혼을 내주시는 분이 없다는 말입니다. 간디, 만델라, 마틴 루터 킹 같은 분들이 우리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맥이 끊겼습니다. 그런데 지난 18일 연세대학의 유동식 교수님이 향년 100세를 일기로 소천하시면서 깨달았습니다. 어른이 없는 게 아니라 찾지 않는 시대구나. 우리 교회 설립 목회자이신 유철옥 목사님과 보스턴대학 동문이시면서 지난 80년대에 두 차례나 오셔서 강단에 서셨습니다. 교회역사를 정리하면서, 키가 훌쩍 크신 그 모습을 사진으로 뵙고, 빳빳한 바짓단에 무척 멋있고 인상깊었습니다. 문득 거의 30년 전 배우고 은혜받았던 풍류도 신학을 돌아봤습니다. 유교수님은 최근 K-culture를 보고도 우리 민족만의 풍류가 작동하는 증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교가 한국에 들어와도 한국적 불교가 되고, 유교가 한국에 들어와도 한국적 유교가 되듯이 그리스도교도 한국적 풍류로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을 보내면서 특별히 집에서 온라인 성찬을 하면서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깨달음이 왔습니다. 남의 소리 듣고 은혜받는 신앙생활이 아닌, 내 신앙, 내 성경, 내 성찬은 무엇인지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안의 풍류와 더불어 빚어질 새 술을 담을 새 부대를 마련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올 한해 마지막이 될 지 모를 고추를 땄습니다. 심기만 했을 뿐인데 기르시는 분은 하느님이심을 다시 절감합니다. 우리는 거두기만 할 뿐입니다.
사실, 작년에는 고추가 무엇인지 심고나서 공부를 했습니다. 줄도 삐뚤빼뚤 엉망이었고, 간격도 너무 좁았습니다. 한 군데 몰아놓는 바람에 고추 한 번 따려면 나무와 나무 사이를 헤집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래도 ‘초심자의 행운’ 같은게 작용했으려나요? 수확이 참 좋았습니다. 그래서 고추는 그냥 원래 잘 자라는 줄 알았습니다. 올 해는 조금 더 야심차게 고추 농사를 지었습니다. 모종도 더 준비하고, 각을 맞추어 딱부러지게 줄을 세웠습니다. 간격도 제딴에는 널찍하게 잡았습니다. 편하게 수확할 수 있도록 일렬로 세웠습니다. 나무가 상할 일이 없도록 말입니다. 다 해놓고 나니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과연 수확이 좋았을까요? 이상하게 반토막이 났습니다. 똑같이 자연농을 했고, 더 바람도 잘 통했고, 초보 농사꾼이 아니라 제대로 된 밭에 태어난 ‘금수저’ 고추나무 대접을 잘 해줬는데도 결과는 제 생각과 달랐습니다. 스포츠에는 2년차 징크스라는 게 있습니다. 1년차에 신인왕에 가까웠던 훌륭한 선수들이 2년차에 더 잘하려고 단점을 보완하다 보니 원래 있던 장점을 잃어버린 결과입니다. 햇살을 내리시고, 바람을 보내시고, 비를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신데, 제가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눈이 멀었습니다. 2년차 실패의 원인 분석을 위해 좀 찾아보니 사실, 이 정도도 할렐루야였습니다. 몇몇 농부들이 고추는 절대 비료 없이 키울 수 없다고들 하소연합니다. 내가 한 일이 아닌 것에 괜히 기대치만 높아졌지, 이 정도만 해도 실상 감지덕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수 농부들은 감사하나 봅니다. 하늘을 바라보나 봅니다. 오늘도 초보 텃밭지기는 인생 농사를 여러해 지어 보신 선배님들에게 한 수 배웁니다. 무엇보다 하느님만 바라봐야 함을요. 여러분 가운데는 미리 연습삼아 쓰셨든 실제로 쓰셨든 유언을 써보신 분들이 있으실겁니다. 아직 안 써보신 분들은 한 번 써보시면 좋겠습니다. 유언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물질적 유산이 있고, 영적 유언이 있습니다. 유산의 분배는 생각처럼 어렵지 않을겁니다. 좀 어렵다 싶으면 도와주는 변호사와 같은 전문가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유언은 생각처럼 쉽지 않을겁니다. 인생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깨달음을 단기간에, 단지 몇 줄로 정리한다는 것이 수십년의 역사를 살아온 장본인으로써 아쉬움을 남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을 바꿔보시는 방법도 있습니다. 유명한 사람일수록 유언이 짧습니다. ‘유명’이라는 것이 그만큼 사람들에게 이름이 알려졌다는 뜻이기 때문에, 반대로 그 본인도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나봐서, 인간의 속성을 잘 알도록 돼 있습니다. 그들 유명인들은 사람들이 남의 말을 길게 기억하리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왔다가 가노라", 혹은 "나 물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가노라" 이런 류의 말 한마디를 남기기도 합니다. 또 제가 좋아하는 버나드 쇼가 남긴 유언은 가장 잘 알려진 유언 중 하나입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줄 알았지.. “.이렇게 말 한 마디로 자신의 생을 정리하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말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중에서 칼 마르크스의 말이 인상적입니다. "마지막 말이란 충분히 얘기하지 못한 바보들이나 하는 거야." 살아 생전에 할 말을 장대하게 하고 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바울이 이런 부류에 속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바울은 얼굴이 잘 생기고, 가문의 재력이 뒷받침 되며, 대중 앞에서 말을 잘하는 그런 류의 사람은 아니었을거라는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합니다. 실제로 바울은 독신에, 지병도 갖고 있었고, 스스로 생계를 연명했으며, 때로 많은 교회 공동체에게 후원을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서 스물 일곱 권 가운데 거의 절반 가까운 열 세 권이 바울의 편지라는데서 알 수 있듯이, 살아 생전에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할 수 있는 말은 글로 전부 남겨 놓았습니다. 이렇게 바울이 편지로 남긴 유산이 있었기에 초기 기독교가 숱한 이단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바울의 유산이 목회적으로 집약된 디모데후서를 오늘부터 함께 나눌 때에, 그의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을 영적 사도의 마음으로 함께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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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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