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기다렸건만, 야속하게도 봄은 온듯 안온듯 지나가고, 어느덧 여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이번 여름, 심신을 refresh 할 계획은 세우셨나요?
저는 비록 성공적이진 못했지만 올해 상반기에 몸을 돌아보게 됐습니다. 사실 이 정도도 만족합니다. 올 여름에는 정신 건강을 잘 돌아보려고 합니다. 제 체크리스트를 함께 나누고 싶어졌습니다. 먼저 언뜻 눈에 띄는 것을 체크해 보십시오. 하고 싶은 것 말입니다. 그리고 올 여름이 지나고 얼마나 지킬 수 있었는지, 그러면서 들었던 감정과 느낌은 어땠는지 서로 이야기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정신과 의사가 추천하는 정신건강에 좋은 일> -친구 -새 친구 사귀기 -오랜 친구와 시간 보내기 -걱정해 주는 사람의 손 잡아주기 -사랑하는 사람 안아주기 -사랑에 빠지기 -한 밤중에 몇 시간 씩 하는 통화 -얼굴이 아플 정도로 크게 웃기 -아무 이유 없이 웃기 -낄낄대며 웃기 -즐거운 대화 -내가 아름답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 -일출 보기 -해변 -일어나 보니 아직 몇 시간 더 잘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건조기에서 꺼낸 따뜻한 수건 -초콜릿 -멀리서 온 전화 -거품 목욕 -따뜻한 샤워 -편지를 받는 일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듣는 것 -빗소리를 들으며 침대에 누워있기 목사: 하나님, 어머니의 생을 인도해주시고,
당신의 따뜻한 손길로 어루만져 주소서. 어머니의 길을 인도하시어 복된 삶을 살게 하시고, 기쁨과 감사의 웃음을 웃게 하소서. 회중: 자식 기르느라 생긴 어머니 영혼의 상처를 치료해주시고, 다정다감한 당신의 노래로 그 영혼을 감동케 하소서. 목사: 주님, 당신께서 어머니를 신뢰하시어 보석보다 소중한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게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걷는 길을 인도하사, 생명을 잉태하고 양육하는 신비를 깨닫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회중: 주님, 찬란한 태양 빛이 풀잎을 초록으로 만들듯이, 진흙과 서늘한 바람이 장미를 꽃피우듯이, 눈물 젖은 어머니의 눈과 부르튼 어머니의 손이 한 신앙 인격을 만들고 성장시키는 신비를 알게 하소서. 목사: 주님, 늦기 전에, 후회하기 전에 물 젖은 어머니의 손을 한번 더 잡아보게 하소서. 어머니의 사랑을 본받아 서로 용서하며 돌보게 하소서. 함께: 더 이상 눈물도 분열도 악의 그림자도 없는 행복한 본향에 이를 때까지 어머니의 사랑과 그보다 더 큰사랑으로 저희를 인도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출처: 향린교회 여러분, 봄이 오는 소리 들리시지요? 자연 만물이 만들어내는 봄의 교향곡이 추웠다 더웠다 하면서 왼발 오른발 춤을 추며 우리에게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제 시선을 사로잡은 녀석이 있습니다. 우리 아파트 발코니 앞에 말 그대로 한 뼘, 책 한권 들어갈 만한 빈 공간에 피어난 노란 튤립입니다.
작년에 교인분들께 집집마다 봄 향기를 나눠드리고 싶어서 튤립 모종 한 그루씩 배달해드리고 남은 녀석을 화분에 심을 수 없어서 아파트 잔디 한 구석에 심었습니다. 작년에 심자마자 바로 다람쥐 녀석들이 다 꽃을 꺾었어요. 낙심했습니다.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일이니까요. 다람쥐들이 자신들보다 귀여운 것은 용서할 수 없다는 무언의 항변을 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전혀 기대치 못했는데 올 해 세 송이가 다시 피어났습니다. 부활절 아침에 불쑥 피어난 튤립을 보고 감동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이 그리 녹록치 않습니다. 부활절 저녁에 돌아와 보니 보라색 튤립 한 송이는 그새 꺽였습니다. 바닥에 덩그라니 떨어져 있어요. 그렇지만 노란색은 아직까지 살아 있습니다. 왠지 저도 오기가 발동돼서 아침 저녁으로 노란 꽃을 보며 묵상을 합니다. 내가 시퍼렇게 지켜보고 있으니 다람쥐들은 꿈도 꾸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거죠. 그렇게 봄은 절반쯤 가고 어느새 5월이 되었습니다. 봄의 교향곡이 울려퍼지고 있는데 저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집착을 하고 있는 거죠. 선물처럼 불쑥 피어난 것에 그냥 왔다 그냥 가는 두 송이 꽃에 마음을 뺏기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이 말씀을 묵상하던 어느날 아침 초연하게 전체 교향곡을 들을 수 가 없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2022년 봄이라는 시즌을 살아가면서 봄의 교향곡을 놓치고, 튤립에만 집착하는 제 모습에 웃음이 나왔습니다. 처음이라 농사도 원예도 전전긍긍합니다. 좀 지나면 낫겠지요. 인생의 선배 되시는 교우님들처럼 초연한 봄날을 맞이하길 기대해 봅니다. 부활 후 예수님의 행적을 정리한 김에 교우님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해마다 교회력에 따라 중점을 두는 본문이 다르기에, 시간 순서대로 살펴볼 수 없었습니다. 오늘 이 칼럼을 통해 부활 예수와 동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안식 후 첫날 오늘날 주일날의 기원이 된 날입니다. 가장 먼저 빈 무덤에 찾아간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 이후 다른 여인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첫 번째 부활의 증인의 영광은 마리아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날 해질 무렵,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성경을 가르쳐 주시고, 성찬을 베푸신 후, 사라지셨습니다. 그날 저녁 무렵, 도마를 제외한 열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문을 닫고 숨어 있던 제자들은 기뻐했고, 성령을 받으며 파송받았습니다. 2. 일주일 후 열 한 제자가 숨어 있던 마가의 다락방에 부활 예수께서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이 때는 의심많은 도마에게 부활을 증거하셨습니다. 3. 어느날 새벽 갈릴리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서 일곱 제자에게 숯불로 음식을 대접해 주시고, 베드로에게 사랑하는 지 묻습니다. 4. 얼마 후 갈릴리의 어느 산에서 오백명의 증인, 곧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다시 얼마 후, 감람산(올리브산, 베다니 인근)에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지상명령을 내리셨습니다. 5. 오순절 이후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를 회심케 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가장 마지막으로 만난 사도 바울로 삼아주셨습니다. * 스데반은 마지막 순간에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서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이후 그는 순교했습니다. 지난 성 목요일과 성 금요일에 미국교회와 함께 드리는 연합 예배가 있었습니다. 갑작스레 모든 행사를 취소해야 했던 2020년부터 고난 주간 예배를 드리지 못했으니까, 2019년 이후 3년 만에 함께 예배할 수 있어서 은혜로웠습니다.
감사하게도 미국교회에서 전통보다 환대를 선택하여 시간을 30분 늦춰주었습니다. 덕분에 많은 분들이 참석할 수 있어서 풍성했던 주중 예배였습니다. 목요일 저녁, 세족식을 대신하여 손을 씻어주는 세수식을 할 때에는 제 온 몸이 떨렸습니다. 퀘이커 교도들이 성령의 임재를 경험할 때 몸을 떤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지요? 저마다 손의 크기와 모양, 온도와 느낌이 확연히 달랐습니다. 악수할 때 느낄 수 없었던 섬세함, 그리고 경건함이 느껴졌습니다. 그간의 전통에서 경험하지 못한 순서는 라틴어로 테네브레라고 불리는 빛의 부재 의식이었습니다.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사, 어둠이 내려앉았을 때를 기억하며 수난 사화를 읽고 촛불을 끄는 예식은 한국 교회 전통에서 본 적이 없는 거룩함으로 저를 이끌었습니다. 한국 교회를 대표하기 위해서 쉽지 않은 한국어로 연습하고 봉독하신 순서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금요일 낮과 저녁에는 뜻밖의 만남에 행복했습니다. 가깝지 않은 거리에 사시는 관계로 주중에 이틀이나 일정을 잡은게 송구하기도 해서 목요일만 강조를 했는데, 중직자 분들께서 낮과 저녁에 번갈아 자리를 채워주셨습니다. 덕분에 교회간 연합이 성사되었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진통을 이겨내고 마른 가지에 물을 끌어 올려 싹을 틔워내는 나무처럼 아프지만 피워내야 하는 우리 삶의 부활입니다. 지난 2년간 말라붙은 신앙이 있다면, 오늘 이 축복된 날을 통해 회복되는 역사가 있기를 손모아 기도합니다.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어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갖게 하시고 우리와 동고동락하게 하신 하느님, 예수께서는 당신의 때가 이르렀을 때에 우리 인간과 정 반대의 선택을 하시고 죽음의 길로 스스로 향하여 십자가에 달리사 우리 죄 사하시어 인류 소망의 기쁨이 되셨나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을 때에 고향으로 향하고 싶은 법이고, 사랑하는 사람에 둘러 싸여 보살핌을 받으며 죽기를 원하지만, 예수께서는 당신의 때를 아시고 고향을 떠나 타지를 향하셨고, 조롱과 채찍의 수모를 당하며 사지에 못박혀 꼼짝하지 못한 채 죽으셨나이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배신당한 채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버림당한 채 십자가에 달려 고통의 정점에서 막힌 담을 허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 예수께서 나귀타고 죽음의 길로 하강하는 오늘, 호산나 환호와 찬미, 종려나무 가지와 겉옷의 숭배에 가려진 고난과 죽음을 마주한 예수의 마음과 우리 마음이 서로 맞닿게 하소서. 오직 예수만 바라보고 부활 소망의 믿음으로 끝까지 동행하는 순례자 되게 하소서. 겸손의 왕으로 입성하사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 죄 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무한과 영원에 눈 뜨게 하신 주 | 곽노순
우리 형편을 아시는 하느님, 우리가 밥과 옷과 집과 자동차만으로 살 수 없고 당신의 얼굴을 사모하는 갈증을 심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친구가 있으나 친구와 원수는 종이 한 장 차이로 변하는 이 세상이기에 당신의 아드님으로 영원한 친구 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내 생각과 내 감정과 내 뜻마저 믿을 수 없는 것은 우리가 바다에 뜬 낙엽처럼 출렁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느님, 우리 존재 중심에 당신의 영을 접목시켜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당신의 영이 우리 속에 활활 타는 불길 되어서 어두움과 어리석음, 차가움과 비정함, 게으름과 회의를 불사르시고 날로 연기 없는 불길로 태우게 복을 주시옵소서. 알몸으로 와서 알몸으로 당신 앞에 서야 하는 이 여정을 잊지 않게 하시고, 이 여정을 가는 동안 수시로 이 성전에 저희를 불러들여서 당신의 무한과 영원에 눈뜨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붙은 세상의 먼지를 성전 문 밖 문지방 바깥에 떨어 놓고 들어오게 하시고 우리의 빈 항아리에 당신의 은총을 그득히 채워 주시옵소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남김없이 비우신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님, 이 시간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지난 한 주 어깨에 짊어진 모든 짐들과 걱정, 근심, 그리고 감정의 찌꺼기들을 주님 앞에 모두 내려놓습니다. 주님 안에 거하지 않고 자책하거나 원망하고, 후회하거나 불안해하는, 어쩔수 없이 연약한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탕자를 따뜻하게 안아주신 아버지의 넓은 가슴으로 우리들을 안아주소서. 큰 아들 곁에 늘 함께 계셨던 무한한 아버지의 사랑으로 우리들 곁에도 항상 함께 계심을 깨닫게 하소서. 사순절를 지내는 시간동안 그리스도께서 가신 좁은 길, 고난의 길을 묵상하며, 우리 또한 그 길에 조율하여, 그리스도의 피로 생명을 살리는 역사의 행렬을 이어가게 하소서. 아직도 쌀쌀한 날씨이지만 새싹은 고개를 내밀고, 곳곳에 꽃들이 봄소식을 전하는 것처럼, 어려운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그리고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가는 나라에도 희망의 싹이 자라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평화로 꽃피워 주소서. 살아계신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은 우리 교회 잔칫날입니다. 반가운 마음으로 마음껏 축복하고 사랑하는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찾아오는 손님들을 보니 타종교인도 있습니다. 종교가 없는 분도 있습니다. 이렇게 잔치를 통해 이웃종교인들을 만날 때 환대하고 축복해 주시는 그리스도인의 품위를 보여주시면 좋겠습니다. 식사를 앞두고 예식을 길게 하자니 방금 예배 드리고 와서 또 드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영어를 쓰는 분도 계시고, 포르투갈어가 편한 분도 계십니다. 이런저런 사연이 겹쳐 오늘 축복 예식은 담임목사의 축복 기도로 대신합니다. 대신 한 주간 여러분 시간 나실 때마다 아래 기도문을 가지고 브랜든을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창조의 하나님, 일년 전 온 세상이 깜깜할 때 한 생명을 허락하시고 이 가정과 교회가 은혜 안에서 양육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은혜의 하나님, 이 가정에 함께 하시어 거룩하게 하옵소서. 이 아이가 평생토록 하나님만 섬기게 하소서. 이 아이가 날마다 건강하고 지혜롭게 커가며 늘 엄마 아빠의 기도와 믿음을 본받게 하소서. 나아가, 이 아이기 사는 동안 늘 하나님께서 펼치시는 은혜의 날개 아래 거하며 마침내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주어진 사명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앞길을 환히 밝혀 주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 도끼가 네 도끼냐’ 하는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도 잘 아실겁니다. 정직과 성실의 가치가 잘 담겨있지요.
저는 이 이야기들이 우리나라 전래동화인 줄 알았습니다. 외국 생활을 처음 할 때의 잇점이 어학 공부때문에 세계 각국의 친구들을 만난다는 점인데, 왠 나라마다 다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가 다 자기 나라 이야기라고 우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 유사한 경험이 쌓이면서 생각에 작은 소용돌이가 치기 시작합니다. ‘아, 내가 아는 세상이 다가 아니었구만.’ 하는 사실을 깨닫고, 정확한 정보를 사랑하는 습관이 생기면서, 천천히 시각이 교정되기 시작합니다. 사실 금도끼 은도끼의 원작은 이솝우화에 나오는 <헤르메스와 간사한 나무꾼>입니다. 인류의 생각이 꽃피던 시대의 이야기가 전 세계에 퍼졌을 뿐입니다.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공자가 출현하던 시대를 축의 시대라고 하는데, 일종의 종교가 탄생하고 철학이 시작된 시대라 해서 야스퍼스가 기원전 육백 년 전후를 <축의 시대>라고 명명했습니다. 바로 이 시대에 이솝 우화가 탄생했습니다.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던 이야기였는데 이걸 파고든 사람, 곧 요즘으로 치면 연구논문을 낸 사람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소크라테스도 사형 직전 죽기 전까지 읽은 책이 이솝 우화였다지요. 예수님도 이솝처럼 동물 이야기를 간혹 비유로 드셨습니다. 이솝 우화보다 한 번 더 꺾여 있고, 그만큼 더 심오한 통찰이 담겨 있는 비유들이지요. 이솝 우화에 가장 많이 나오는 동물은 여우가 아닐까 합니다. 우화의 독자들을 골탕먹이던 존재, 즉 사악하고 교활한 마음을 가진 경제적 신분적 포식자들이지요. 그러나 꼭 여우가 밖에 있는 다른 대상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안도 들여다 봐야죠. 사순절 둘째 주간을 맞이하는 오늘부터는 <내 마음 속 여우>를 찾아 떠나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