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 시대는 몇 십년전에는 상상하지 못할 수준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손주들의 재롱을 유투브에 올려놓으면 다운로드 받을 필요도 없이 즉시 볼 수 있습니다. 물리적인 거리는 쉽게 오갈 수 있는 몇 시간 거리 외에는 나머지는 엇비슷하게 느껴집니다. 전처럼 멀게 느껴지진 않습니다.
이렇게 사람과 사람만 연결되어 있는게 아닙니다. 제 집에서 교회 컴퓨터에 연결할 수도 있고, 조그만 기계 하나가 휴대폰과 TV, 그리고 램프와 에어컨도 연결해 줍니다. 휴대폰으로 직접 날씨를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버튼만 누르고, 한국어로 “날씨?” 라고 물어만 봐도 자동으로 찾아서 알려줍니다. 이렇게 정보와 기계와 사람이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지금보다 스무 배 빠른 인터넷이 개발중이라고 합니다. 명실상부한 초연결(hyper-connectivity) 사회입니다. 많이 들어보셨을 4차 산업 혁명은 이러한 기술발전과 함께 이미 진행중입니다. 게다가 예고 없이 찾아온 바이러스로 인해 일부 기술은 우리 가정 안으로 들어와버렸습니다. 온라인교육이 이미 시행중이고, 원격 진료의 전단계로써 현재 대부분의 진료는 인터넷이나 전화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지 않고 할 수 있는 기술부터 우리 삶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겁니다. 교회의 고민은 점점 커집니다. 동료 목회자들도 만나면 미래 목회에 대한 설계에 여념이 없습니다. 참으로 그 날이 도적같이 찾아왔습니다. 만날 수 없는 현실 앞에 우리 교회도 온라인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함께하지 못하는 분들이 늘 마음에 걸립니다. 문제는 펜데믹 시절에만 온라인 예배가 유지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비대면"이 곳곳에서 일상화 될 것인데, 교회도 예외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걱정이 많지만, 하나님은 걱정하지 않으신다는 신문기사를 봤습니다. 사실 역사를 봐도 전염병은 사람들의 삶의 형태를 변화시킵니다. 전염병을 막을 수 있는 방법(상하수도, 넓은 도로, 방호진료복)의 개발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 튀어나옵니다. 역사와 기술의 발전 또한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초연결사회로 참여할 때입니다. 얼마전 우리교회 온라인 예배 분석자료를 보다가 의외의 결과를 발견했습니다. 절반은 한국에서 시청한 것으로 나옵니다. 이제는 국경을 넘나드는 광활한 온라인 시대입니다. 복음전파의 장은 더 넓어졌지만, 그보다 사랑하는 우리 교우님들의 디지털 소외는 이참에 시급히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큰 마음 먹고, 스마트폰을 장만하시면 어떨까요? 손주들 재롱도 자주 보시고, 예배도 함께 어우러져 드리는 디지털 공동체를 이룰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어쩌면 때를 잘 만난 사람입니다. 때마침 인쇄술이 발명되어 사람이 수 천일 동안 해야 할 일을 기계로 하루만에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종교개혁의 시작은 루터 150년 전 위클리프로 거슬러 올라갑니다만, 플랫폼이 준비되어 있지 않던 시절에 개혁을 외쳤기에, 앞선자들은 이단 판정과 부관참시만 당했을 뿐이었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사도 바울도 때를 잘 만난 사람입니다. 당시 로마가 세계 전역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려고 도로를 잘 닦아 놓고, 그에 걸맞는 치안을 유지해 놓았기 때문에 역사적인 복음전파자 가 되었습니다. 이전 사람들은 옆 나라만 가려고 해도 수 개월을 투자해야 했고, 위험이 뒤따랐는데, 바울은 세 번이나 선교 여행을 무사히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루터보다 더 안전하게 신앙생활을 하거나, 바울보다 더 쉽게 세계 곳곳을 찾아 선교할 수 있습니다. 참 좋은 때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런 시절을 뒤로하고 조금 불편하게 살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에 모이고 싶어도 모일 수 없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정성 가득하고 풍성했던 주일 친교는 당분간 언감생심입니다. 또, 여행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항공사는 파산하고 있으며, 개인의 자유로운 여행은 상당한 의료적 검증 절차를 요구하는 것으로 바뀔 것입니다. 새로운 질서가 오고 있습니다. 뉴 노멀의 시대를 준비할 때입니다. 300년 전의 동일 직업인이 오늘날 부활해서 사진만으로 자신의 일터를 알아볼 수 있는 경우를 일컬어 변함이 없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1700년대 학교 선생님에게 교실 사진을 보여줍니다. 그는 단번에 교실이라고 외칠 것입니다. 교회로 대입해 보면 어떨까요? 무려 천 년전의 사진을 보여줘도 그 성직자는 맞출 것입니다. 학교와 교회는 시대의 흐름과 변함없는 진리를 담지하는 기관입니다. 시대정신에 따라 방법과 환경은 달라질 수 있고, 필요성은 제기되었지만, 꼭 변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에 쫓기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다른 환경에 서 있습니다. 함석헌이 오래전 말한 새 나라는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 인류는 죽음에 직면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문제는 죽음의 관문을 먼저 뚫는 한 놈이 있어서만 풀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낡은 시대의 철학, 종교에 마비된 마음을 씻어서 우리 속에 스스로 밝아진 새 종교, 새 철학으로 말을 하면 그 순간에 이 세계가 죽는 동시에 그 좁은 문 저쪽에 이때까지 알지도 못했던 새 나라가 열릴 것입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함석헌> 76행이 검열삭제되고 33행만 실린 전남매일신보 1980년 6월 2일자 아아, 우리들의 도시 우리들의 노래와 꿈과 사랑이 때로는 파도처럼 밀리고 때로는 무덤을 뒤집어쓸지언정 아아, 광주여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무등산을 넘어 골고다 언덕을 넘어가는 아아, 온몸에 상처뿐인 죽음뿐인 하느님의 아들이여 광주여 무등산이여 아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 꿈이여 십자가여 *검은 글씨:신문 게재 *붉은 글씨:검열 삭제 5.18 당시 전남매일에 실린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김준태)> 5연과 10연입니다. 이 시는 제목조차 뚝 잘렸습니다. 검열 삭제된 부분을 포함한 전문은 손에서 손으로, 복사신문으로, 그리고 외국기자의 비디오로 전 세계에 배포되었습니다. 검열 기준은 뭐였을까요? 계엄당국은 십자가가 무척 눈에 거슬렸나봅니다. 십자가! 그 날 신문에서는 먹으로 가렸을지 몰라도, 8-90년대 민주화 역사 가운데 군중의 함성으로 부활하여 여럿이 함께 짊어진 고난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시인은 검열을 예상했기에 일부분만 살아남더라도 이면에서 메아리치는 울림의 생명력은 전할 수 있도록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잘 담아냈습니다. 예술의 신비이자 아름다움이지요. 핀란드의 작곡가 시벨리우스도 러시아제국의 검열에 비밀스럽게 저항하며 <핀란드의 봄에 들어오는 행복한 느낌>이라는 화사한 페이크 제목을 달아서 작품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남은 이 곡은 핀란드의 국가이자 미국 찬송가로도 불립니다. 수백만명이 죽어가고, 바다를 떠다니는 난민들은 감염의 위협에 노출된 채 눈물로 호소하지만 국경들은 봉쇄된 오늘입니다. 어둠 가운데 무거운 소식만을 전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요.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며 하늘뜻을 펴는 가운데, 밝게 웃으며 매 주일 온라인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의 심연에는 타자를 향한 연민과 십자가 사랑이 깊게 뿌리내리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추락하려는 비행기가 있었습니다. 불행히도 낙하산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기장은 각국의 승객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독일인에게는, "그냥 뛰어내리는 것이 이 비행기의 규칙입니다!" 이탈리아인에게는, "그냥 뛰어내리면 여자들이 몰려들 겁니다!" 일본인에게는, "다른사람들도 다 그냥 뛰어내리고 있습니다!" 미국인에게는, "그냥 뛰어내리면 당신은 영웅이 됩니다!“ 난세에 영웅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계 각국이 국난을 겪고 있는 오늘날, 누구보다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의료진들은 우리의 영웅입니다. 똑같은 식당을 다니고, 똑같은 버스를 타던 평범한 사람들이었지만, 어려움을 겪는 순간 마지막 한 사람까지 살리기 위해 감염의 위험과 가족의 만류를 무릅쓰고 생명을 돌봅니다. 며칠 전, 친구가 걱정돼서 연락을 해봤습니다. 심각한 뉴욕의 대형병원에서 원목으로 일하는 친구입니다. 친구는 본인과 동료들 모두 잘 버티고 있고, 건강 하다며, 정작 의료진들은 언론의 영웅 만들기를 불편해 한다는 겁니다. 미국 사람들은 사회 어떤 분야에도 영웅이 있어야 안심을 하지요. 미식축구의 쿼러백, 민주주의의 대통령, 세계 평화를 지켜주는 미군, 헐리우드의 영화배우…, OO계의 어벤져스. 이렇게 영웅에는 서사가 필요합니다. 역경을 딛고 이겨낸 비하인드 스토리, 누군가의 죽음을 계기로 각성한 이야기, 결정적인 순간의 혼신의 힘을 다해낼 수 있었던 이유… 영화만 해도 그렇습니다. 헐리우드식 재미난 영화에는 분명한 영웅과 악당이 존재합니다. 심지어 가장 오래된 문학이라 할 수 있는 ‘길가메시’ 또한 영웅 서사시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영웅보다, 영웅이 나타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정책과 리더십을 더 필요로 합니다. 이와 더불어, 소리없는 영웅들의 발자국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삶에 대한 피상적인 태도는 누군가 눈에 띄게 활약하거나, 심지어 그로 인해 희생당하는 이들만 찬사하거나, 팬덤을 형성합니다. 즉, 구경꾼의 자세입니다. 이 와중에도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실상의 영웅입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벗들을 찾아가 마스크와 화분과 고구마를 전하는 이들, 길에 핀 꽃을 휴대폰으로 찍어 나누는 이들, 손님을 위해 이익과 상관없이 가게 문을 여는 이들, 나도 어려운 형편이지만 더 어려운 사람 배려하는 이들, 아파하는 이웃을 위해 매일 기도하고, 찾아가 멀찍이서라도 위로하려는 이들, 가족을 위해 삼시 세끼 밥하는 이들 ,.. 모두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조금 더 세밀하게 눈을 뜨고 하루하루 말씀에서 배운 길을 걷는 사람들, 바로 여러분이 일상의 영웅입니다. 어떤 젊은이가 에게해에 떠 있는 작은 외딴 섬에 홀로 사는 수도사를 찾아 갔다. 높은 바위위에 있는 작은 방에서 홀로 기도하며 여생을 보내는 수도사에게 젊은이가 물었다. “요즘도 악마와 씨름하시는지요?” 수도사가 말했다: “나도 늙고, 내 안의 악마도 늙어서 더 이상 씨름하지 않는다오. 대신에 요즘은 하나님과 씨름하지요.” 의외의 대답에 놀란 젊은이가 물었다. “하나님과 씨름하신다고요? 그럼,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기길 바라나요?”
수도승이 눈을 감으며 말했다. “아니요, 내가 하나님께 지게 되길 기도한다오.” 그리스의 유명 작가 카잔차키스의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있다면, 태도의 전환입니다. 불과 얼마전까지 인간은 지칠줄 모르고 오만했습니다. 과학기술은 한없이 발달해서 화성까지 우주여행하는 티켓을 판매했고, 의료기술의 수준은 인간이 백세인생을 훌쩍 뛰어넘어 은퇴 이후의 삶이 인생의 절반 가까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소위 안될게 없었던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별 해당사항도 없는 이야기들입니다. 슈퍼리치들의 꿈에 영속되어 구경꾼으로써 동시대에 그 일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귀한 경험이라며 자족했습니다. 그리고, 그 치기어린 욕망은 이기심으로 돌변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을 실현시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순진한 목소리일 뿐이었습니다. 가끔 목에 걸린 빨대로 고통당하는 거북이 사진을 보며 공감 버튼을 누르고, 종이컵 대신 텀블러를 쓰는 걸로 몫을 다했다며 스스로 위로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이 맑아지듯 희안하게 우리 인류의 마음도 맑아짐을 느낍니다. 태도가 시나브로 바뀌어갑니다. 내 가족, 내 조국만 생각하던 마음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미국을 포함한 유럽과 중동, 심지어 일본을 가엽게 여기는 마음으로까지 고양됩니다. 예수께서 그토록 말씀하셨던 조건없는 사랑을 모두가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확실한 지구 디톡스 효과를 절감합니다. 이기는 게 우리 편이고, 이기는 게 남는 것이었던 전후 세대, 돈 버는게 우선이고, 오늘 놀다 죽자던 젊은 세대 모두가 일시적일지 몰라도 어느덧 수도승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이기려는 마음 없는 인류의 영혼,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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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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