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주간 싱글맘들에게 렌트비를 1년간 부분 지원하는 일을 위해서 복잡한 작업을 했습니다. 지원서를 보고, 조정하고, 비교 분석하면서, 각 사람들의 사연들을 살펴봤습니다.
어떤 분은 반지하에 살면서 물을 퍼내다가 넘어져서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분은 언제 멈출지 모르는 심장 전기 자극 기계를 끼고 살아갑니다. 그래도 아이를 살려야 해서 네일 가게에서 일하다가 알러지로 더 고생합니다. 어떤 분은 아침에 나가서 두 시에 반드시 집에 와야 합니다.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허드렛일만 알아봅니다. 어떤 분은 아이가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해서 삶이 벼랑끝으로 몰렸습니다. 아이가 살아야 본인의 존재 이유가 있기에, 직장을 이틀로 줄이고 아이와 함께 있어주었습니다. 자연히 렌트비를 낼 수 없게 되는 처지에 몰렸습니다. 이 분들은 어쩌다가-그야말로 어쩌다가입니다.- 서류미비상태가 되어서 연방 정부로부터는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습니다. 교회도 한 집을 먹여 살릴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지난 겨울 십시일반 도와주신 마음이 모여서 세 가정에게 렌트비를 지 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서류 작업을 마치고 인터뷰까지 끝내고 나니, 저에게 몸살이 왔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들여다 보고 싶지 않은 현실이지만, 한 분이라도 더 절실한 분에게 도움이 돌아가야 하기에 보고 또 보다보니 몸이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한낱 지켜본 것으로 몸과 마음이 아파하는 제 자신을 보면서, 그 삶을 직면하여 살아내야 하는 그 분들은 얼마나 아플까 생각했습니다. 아무쪼록 이 귀한 사역에 책임감을 가지고 함께 해주시는 여러분들께 다시 한 번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이번 주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들여다 보고 싶지 않은 예수님의 수난의 여정,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걷습니다. 힘들지라도 귀한 여정입니다. 이 또한 함께 해주시는 여러분들이 있어서, 어깨동무 하는 마음으로 한 걸음 떼어 봅니다. 은혜와 자비의 하느님,
오늘 우리 지구 반대편 튀르키예와 시리아 땅에서 애통하는 소리를 들어주소서. 붕괴된 건물 잔해에 갓 태어난 생명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많은 이들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간절한 소리를 들어주소서. 이 참혹한 생사의 갈림길에서 한 생명이라도 찾고자 주검이라도 거두고자 땀흘려 구조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도움의 온정을 보내는 손길이 있습니다. 손모아 기도하는 영혼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수고와 기도가 헛되지 않게 하시고 기적을 일으켜 주옵소서. 우리의 위로 되시며 희망의 원천되시는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작은 소망
이해인 / 수녀, 시인 내가 죽기 전 한 톨의 소금 같은 시를 써서 누군가의 마음을 하얗게 만들 수 있을까 한 톨의 시가 세상을 다 구원하진 못해도 사나운 눈길을 순하게 만드는 작은 기도는 될 수 있겠지 힘들 때 잠시 웃음을 찾는 작은 위로는 될 수 있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여 맛있는 소금 한 톨 찾는 중이네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예수님 말씀 꼭 부여잡은 간절한 이해인 수녀의 소망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오늘은 정월대보름입니다. 교회 절기는 아니지만, 보름달이 환하게 뜬 오늘 둘러 앉은 교우들 서로가 건강을 빌고, 복을 나누며, 한 해 농사, 그러니까 사람 농사 그리고 사랑 농사, 그리고 삶 농사 잘 지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복 받게 되어 있는 8가지 이유입니다.
1. 가난: 우리 제일한인교회 교우님들은 빈 도화지와 같습니다. 보통 교회에는 영적으로 교만하여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교회에서 이런 분들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겸손히 잘 받아들이는 천국백성입니다. 2. 애통: 우리는 애통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병으로 연약한 자녀와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고, 서로의 건강을 진심으로 배려합니다. 하늘의 위로가 성령을 통해 임하실 것입니다. 3. 온유: 자만하거나 고집부리는 성도가 없습니다. 친절하고 오래 참는 것은 우리 자랑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온유입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되기를 원하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4. 정의: 수많은 목회자들이 정의를 외쳤던 예언자적 직무를 감당하는 데 부담스러워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우님들은 하나님의 의를 구현하는데 거리낌이 없기에, 말씀을 잘 받아들입니다. 5. 긍휼: 예수께서는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입니다“ 라고 자비를 보이셨습니다. 마땅히 불쌍히 여김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교우님들은 긍휼에 열려 있고, 잘 실천하고 계십니다. 6. 청결: 순수함으로는 우리 교우님들을 따라갈 자가 없습니다. 요즘 비즈니스에 도움 되려고 교회를 다닌다지요? 그러나 청결치 못한 마음으로 직분을 탐내거나 남보다 높은 데 앉으려는 사람은 못봤습니다. 7. 화평: 어쩌다 보니,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의 모범을 따르지 못하게 되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갈라진 상처가 흔적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처는 우리로 “주님의 평화”를 남다른 마음으로 부르게 하였고,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8. 박해: 정직하고 신실한 공동체를 일구고 살아가다 보면 자연히 이간질과 박해는 따라옵니다. 사탄의 사업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영혼을 평안케 하시는 예수님을 붙잡고 수십년째 교회를 지키고 있는 여러분은 복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이번 한 주간 받을 복을 한 번 세어 보십시오. 모든 교우님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유년 시절, 어느 설날이었습니다. 친척들이 한 상에 둘러 앉아 맛있게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우리집 냄새와 사뭇 다른 할머니 댁의 공기, 왁자지껄한 사촌들, 재미있는 덕담을 나누머 하하호호하던 그 날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바로 어제 일처럼 기억하는 이유는 큰아버지의 한 말씀 덕분입니다. 요즘처럼 먹을 것이 흔하지 않던 시절, 저에게 명절 때 고기반찬은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기를 몇 점 집어먹을 때, 큰 아버지께서 핀잔을 주셨습니다. ‘너는 요즘에 너무 살이 쪘으니까 채소만 먹으라 ‘는 말에 풀이 죽어서 젓가락질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다 집에 온 그날 명절은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사촌들은 ‘와하하’ 하며 한 번 웃어넘겼을 일이 저에게는 작은 상처가 되었습니다. 어린 아이들도 상처를 받습니다. 어린 아이들도 다 기억합니다. 그런데 상처가 약이 되는 경우도 꽤 있습니다. 저는 그날부로 체육관에 다녔고, 눈빛도 달라졌고, 학교에서 인기도 많아졌습니다. 평생 선생님을 하다가 은퇴하신 큰아버지의 신의 한 수였다고 한편으로는 고맙게 생각합니다. 한 스승 목사님은 ‘혼이 나봐야 혼이 돌아온다’며 혼 내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해합니다. 그런데 운동을 잘 하고, 인기가 많아지는 것은 부차적인 소득이었습니다. 그날 상처로 인한 가장 큰 소득은 ‘부당함에 대한 관점’이 생겼다는 점입니다. 어려서부터 유순했던 의외로 정의롭게 살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많다고 어린 아이를 여럿 앞에서 망신 주면 안되는 것처럼, 힘이 센 사람이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일을 두고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남성이 여성을,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큰 사람이 작은 사람을, 주류가 소수자를 괴롭히는 일에 누구나 민감하게 반응할 수는 없지만, 저처럼 상처를 받아봤던 사람은 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모두 상처 입은 이들이었습니다. 상처입은 이들을 치유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래전 영화 ‘밀양’에서 인상깊은 대사가 있었습니다. "제 죄는 하느님께서 용서해 주셨습니다"라는 살인범의 고백입니다.
이는 복음을 왜곡하여 받아들이는 행태입니다. 우리 죄를 깨끗이 씻어주신다는 말을 그 살인법도 오래 묵상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우리 주 예수께서 내 죄를 사해주신것에 한참을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살인범에 의해 아들을 잃게 된 엄마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지만, '어떻게 내가 용서하기도 전에 하느님이 먼저 용서하실 수 있어요'라고 하소연합니다. 사실은 그 살인범을 용서하러 갔는데도, 그 살인범의 용서 운운하는 현실의 부조리함 앞에서 울부짖습니다. 얼마전 흥행했던 ‘더 글로리’라는 미니시리즈가 세간의 화제입니다. 친교 시간에 장로님 한 분의 추천을 받아 보게 됐는데, 종교적 코드가 여럿 보였습니다. 고통받는 피해자 눈에 비친 빛의 십자가는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제작자의 의도는 모르지만, 어쩌면 예수께서도 그 빛의 십자가에 매달려 같이 고통받고 계셨을지 모르겠습니다. 밀양의 살인자와 비슷한 고백을 하는 배역이 또한 인상적입니다. 피해자를 괴롭히는 학교폭력 공포의 5인방 중에 대형교회 목사님 딸이 있습니다. 매직기라고 불리는 머리를 펴주는 헤어 고데기로 주인공을 괴롭히는데 방관으로 일조했던 그녀는 훗날 달러가 가득 들은 가방을 건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난 너한테 한 짓 다 회개하고 구원 받았어.” 혹자들은 이런 구원관, 이런 용서의 관점이 세계교회 입장에서 봤을 때 상당히 독특해서, 'K-기독교’라는 장르를 만들어냈습니다. 바야흐로 K의 시대입니다. K컬쳐를 필두로 한 K에는 명과 암이 존재합니다. 다만 K 기독교가 차별에 앞장서고, 부패에 연루되고, 부당하게 누군가를 괴롭히고,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구원관에 머무르지 않고 회개하고 돌아서서 빛으로 오신 예수님 편에 서기를 함께 기도합시다. 어렸을 때 제 부친께서는 밥알을 백 번씩 씹어서 삼켜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물처럼 만들라고 아이가 알아듣게 설명을 곁들이셨습니다.
음식을 아주 잘게 자르다 보면 물에 가까워집니다. 기력이 없어서 죽도 못먹는 사람은 미음을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씹어도, 아무리 잘게 만들려고 해도 공기처럼 잘게 나눌 수는 없는 법입니다. 다시 말해 물 보다 부드러운게 바람입니다. 바람보다 부드러운 게 있다면 햇살이 있습니다. 공기 입자보다 태양의 입자가 훨씬 작습니다. 결국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근원적으로 이 태양이 주는 양분을 먹고 삽니다. 그러나 육의 양식보다 중요한 영의 양식이 되어주시는 존재가 있습니다. 이 존재는 햇살보다 더 미세합니다.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존재한다... 실재한다고 말해도 믿을 수 있는 사람있고, 없는 사람 따로 있습니다. 이 존재는 바로 우리 주님입니다. 존재의 근원되시는 주님께서,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께서 마치 햇살과도 같이 온 세상을 비추십니다. 먹이사슬의 최상위에 사람이 있고, 그 밑으로 온갖 크고 작은 동식물들이 줄지어 있다면 그 가장 밑바닥에는 가장 작은 입자로 존재하는 햇살이 있습니다. 그 빛을 만드신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창조주이심과 동시에 햇살보다 더 근원적으로, 가장 낮은 곳으로 우리에게 와주신 분이 우리가 고백하는 성삼위 하느님이십니다. 예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라고 스스로를 말씀하셨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또한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한 영원한 존재가 오늘 요한의 세례로 기꺼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목숨은 스스로 버리는 자가 사는 법입니다. 존재의 근원자가 스스로 내어주심으로 영원에 이르는 모범을 선생님의 입장으로 우리에게 보이신 사건, 곧 ‘세례’입니다. 해바라기라는 한국의 오래된 음악 그룹이 있습니다. 히트곡 '사랑으로'라는 노래가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밖에도 수많은 명곡이 있지만, 왠일인지 지난 주간에 ‘모두가 사랑이에요’ 라는 노래 가사가 제 입술에 맴돌았습니다.
참고로, 해마다 마지막 날 즈음이면 한 해를 돌아보며 호흡을 깊게 하고, 일단 정지해 봅니다. 몸도 정지해 보고, 스케줄도 정지해 봅니다. 그 중에서 판단을 중지해 본다는 의미로 ‘에포케’ (epoché)라는 기법도 사용해 봅니다. 무조건적인 동의를 보류 (withholding of assent) 해 보면, 생각을 맑게 하는데 제법 도움이 됩니다. 그렇게 고요함을 누리고 있을 때, 제 마음에서는 어떤 연유로 찬송가도 아닌 흘러간 유행가 가사가 흘러나왔을지 궁금했습니다. 뉴욕에 가족여행을 다녀와서 기분이 좋았던 탓이었을까요? 크리스마스 때 만난 반가운 얼굴들과, 교우님들과 나눈 따스한 사랑도 적잖이 한 몫 했을겁니다. 사실 '판단 중지'를 해 보기 전까지 신년 목회 방향을 가지고 씨름을 한참 하고 있었습니다. 공동체 성서읽기와 말씀사역으로 코로나 시절을 잘 견뎌낼 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과 더불어 이제는 교회가 ‘하느님의 선교 동역자로서의 교회'라는 본질에 걸맞게 하나 둘 업데이트 되어야 할 때라고 방향을 잡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모두가 사랑이라는 고백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모두가 사랑이라는 뜻은 참 좋은데 과연 어떤 배경인지 가사를 찾아보고 그 심오함에 무릎을 탁 쳤습니다. 첫 가사는 ‘모두가 이별이에요'였습니다. 이별을 해 보고서야 온 세상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은 특별한 경험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별의 어둠을 통과해 본 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세계가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사랑은 질척질척함이 아니라 단호한 이별 이후에 찾아오는 순전한 감정입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이별할 것이 있나봅니다. 과거의 것, 썩어질 것은 2022년에 두고 순전하게 새해를 맞이합시다. 새해엔 다른건 몰라도 우선 사랑합시다. 성탄 대축일에 있는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성탄 시
<크리스마스 캐럴> A Christmas Carol 절망의 한 겨울에, 서릿발 실은 바람은 신음을 하고 대지는 쇳덩이처럼 서있고, 물은 돌덩이처럼 얼었네 눈은 내리고 눈 위에 다시 눈이 내리고 먼 옛날 절망의 한 겨울에 우리 하느님, 하늘도 그분을 붙잡지 못하고, 대지도 품지 못하네 그분이 오시어 다스릴 때 하늘과 대지는 멀리 달아나겠네 절망의 한 겨울에, 전능하신 주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는 작은 곳으로 만족하셨으니 그것이면 충분했네, 그분에게는 케루빔이 밤낮으로 그분을 예배하고 어머니의 젖과 구유에 놓인 건초만 있어도 그것이면 충분했네, 그분에게는 천사들이 그분 앞에 내려오고 경배하는 소와 나귀와 낙타만으로도 천사들과 대천사들이 그곳에 모이고 케루빔과 세라핌도 하늘에서 무리를 이루었으나 오직 그분의 어머니는 동정의 복락으로 사랑하는 아드님께 입맞추며 경배했으리 가난한 나는 그분께 무엇을 드릴까? 내가 목동이었다면 그분께 양을 드리고, 내가 동방박사였다면 그분께 내 보물을 드렸을 텐데. 다 번역: 주낙현 신부 하얀 눈이 내려
온 세상을 덮듯이 우리의 걸음 걸음 죄의 발자국 모두 덮으사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려 오신 임마누엘 하느님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에 연약한 존재의 옷을 입으시고 더 낮고 낮은 곳을 찾으신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도 낮은 곳을 향하게 하소서. 이제 우리 빈 마음을 열어 우리 주님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평화로 오시는 주님, 자비로 오시는 주님, 사랑으로 오시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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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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