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웃인가?> 1/6: 가나안 성도
사순의 시절,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지 여섯 번에 걸쳐서 돌아보고자 합니다. 내면의 성찰과 더불어 이웃을 돌보자는 마음은 가졌지만, 누가 이웃인지 공감하는 자리를 마련해야겠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주 한 목회자와 통화하던 중, 논문 진행을 위한 설문지 회수에 어려움을 겪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유가 안타까웠습니다. “가나안 성도 현상을 인정할 수 없대요“ 가나안 성도는 교회를 ‘안나가’기로 작정한 신앙인들입니다. ‘안나가’를 거꾸로 말하면 ‘가나안’입니다. 유럽과 미주에서 한 차례 지나갔고, 이제 한국사회에 몰아닥친 교회 이탈 현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기본적으로 ‘사실과 가치를 구분’하는 소양을 갖춰야 합니다. 가치, 즉 믿음의 영역과 사실, 즉 현상의 영역을 구분하지 못하고 교회 안 개구리가 되는 상황이 눈에 선합니다. 인정이 문제가 아니라, 현상을 똑똑히 보고 대안을 마련하는게 중심 이슈가 되어야겠지요. 세월호 침몰은 약속된 비상매뉴얼을 지키지 않은 승무원들과, 약속된 구조를 마음대로 변경함으로 일어난 비극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침몰합니다. 새 길을 찾아나가는 공동체, 말씀대로 사랑하며 사는 공동체가 살아남을 것입니다. 누가 이웃인지, 알고, 찾고, 행하길 소망합니다. 영적 도약의 시기, 사순절이 시작됐습니다. 해마다 사순절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금욕과 기도로 고난당하신 예수의 길을 따르고자 합니다. 거룩한 영적 습관으로 어느새 잘 자리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욕망이 다양해진 만큼, 이제는 곡기를 끊는 금식 뿐만 아니라 미디어 금식, 기후정의를 위한 탄소 금식, 생태 평화를 위한 채식까지 다양한 형태의 신앙 훈련이 아름답게 꽃피워지는 금욕 르네상스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저도 두 가지 정도, 소박한 영혼의 다이어트를 시도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만, 그것에만 무게 중심이 놓여서는 삶의 추가 기울어질 것 것입니다. 아래 그림처럼 현실은 외면한 채, 나의 영성훈련에 매몰된 신앙은 잘 차려 입고 ‘거룩한 가난’을 소비하거나 품평하는 수준에 머물고 맙니다. 욕망의 <빼기>와 실천의 <더하기>가 병행되는, 균형잡힌 영혼의 식단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영적 요요 현상 없는 신앙인 되시길, 나이테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성실하게 한 겹씩 쌓아나가는 경건의 길을 걸어가시길 소망합니다. 요즘 코로나 블루라고 하지요. 정신과 상담 요청이 예년 대비 두배 가까이 늘었다고 합니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의 강의를 한 번 들어보니까, 이 한 가지는 꼭 기억해야 한다고 합니다.
“당신 탓이 아닙니다.” 저는 공감이 많이 됐습니다. '의기소침'의 속을 열어보면 자칫 ‘자책’이 숨어 있는데, 여러분의 탓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혹자는 기독교가 지금 바닥을 드러내면서, 사회적인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까지 다 내가 감당하려고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코로나 블루가 지나치면 코로나 레드로 넘어간다고 합니다. 우울을 넘어 화가 나고, 사소한 일에 성질이 나는 단계입니다. 거기서 더 진행되면 코로나 블랙이라고 합니다. 깊은 어둠입니다. 깊은 좌절입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이 좌절해서 쓰러지는 단계입니다. 바라기로는, 이민자로 이런 마음고생을 여러번 겪어봤기에, 그리고 여전히 낯선 땅에서 여전한 인종차별로 그러한 마음고생이 진행형이기에 이미 우리에게 항체가 있다면 좋겠습니다. 코로나 블루 레드 블랙이 우리에게 끼어들 틈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쪼록 마음밭을 잘 보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서로 보듬어 주시고,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십시오. 어느날 어둡고 깊은 산에서 두 사람이 길을 잃었습니다. 한 사람은 철학자고, 한 사람은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은 의심하는 사람, 한 사람은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고 벼락이 내립니다. 그때, 철학자가 하늘을 쳐다보면서 “저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말합니다. 반대로, 신앙인은 번개 불과 벼락을 조명삼아 길을 찾습니다. 처음 코로나가 터졌을 때의 예상과 달리, 오늘 우리의 처지는 칠흑같은 깊은 밤, 산길을 헤메는 모양새입니다. 저 두 사람 가운데 여러분은 어느 편에 가까우십니까? 위기를 모면하고자 할 때, 우선순위는 현실 파악입니다. “내가 길을 잃었구나” 하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길을 찾습니다. 인식이 시작되는 순간, 전 우주가 보내는 신호는 모두 길을 밝히는 빛이 됩니다. 신앙인이라고 다 현실 파악에 능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요즘은 신앙인이 철학자처럼, 철학자가 신앙인처럼 굽니다. 길을 잃었는지 모르는 교회와 신앙인이 태반인 것처럼 보입니다. 모쪼록 이 험난한 시대에, 신앙생활을 돕는 성경통독이라든지, 설교라든지, 친교라든지 모두 샛길을 도와주는 번개로 사용되면 좋겠습니다. 그저 거기 몰입해서 철학자 마냥 “성경은 무엇인가”, “교회는 어때야 하는가”와 같은 지적관심사로 신앙생활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내 속을 환히 들여다 보는 등불로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신호를 감지하십시오. #이민자보호교회_전국심포지움 에
여러분을 정중히 초대합니다. 지난 4년간 수많은 이민자들, 특별히 서류 미비자들이 고초를 입었습니다. 이러한 필요에 의해 교회가 피난처가 될 수 있도록 120개 교회가 힘과 지혜를 모았습니다. 4년간 다양한 목소리들을 들었고, 어려운 이들의 마음을 돌봤습니다. 어느새 대대적인 이민 개혁 법안이 입법될 채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민자 보호교회는 할 일을 다한 것일까요? 이 시점에, 이민자보호교회는 지난 4년의 사역을 돌아보고, 향후 사역을 내다보는 분깃점에 서서, 하나님의 이끄심을 구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해 보고자 전국 심포지엄을 준비합니다. 다양한 목소리들이 연합하여 선을 이룹니 다. 필라델피아 빈민촌에서 사역하시는 #이태후 대표가 설교하고, #홍근수 목사님과 #곽노순 목사님의 제자인 #김정호 목사께서 축도하십니다. 시카고에서 싱글맘을 돕고, BLM지원하시는 #손태환 목사,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시는 #주디장 변호사, 그리고 조지아에서 난민 2세대들을 세계시민으로 훈련시키는 #김종대 대표가 발표합니다. 뉴욕 대표 #조원태 목사, 뉴저지 대표 #김대호 목사를 비롯한 준비위원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여러 변호사님들과 교수님들 틈에 부족한 저도 작게나마 논찬으로 몫을 감당하려고 합니다.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전통적인 교회의 경계가 새로운 길을 향해 열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약간의 대안을 소개받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 복된 자리에 사랑하는 여러분을 초청합니다. 함께 새 날을 열어나가길 소망합니다! 바-바-바이든이라고 불리던 소년이 있었습니다. 대통령을 꿈꾸던 소년은 유년시절 말더듬이로 친구들의 놀림을 받았습니다. 바이든의 아버지는 “결코 불평하지도, 설명하려 들지도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저는 이 조언에서 신앙적으로 중요한 포인트를 발견했습니다. 남들의 페이스에 휘말리는 대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본인의 몫에 집중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영적인 길을 간다는 것은 누가 뭐라든 묵묵히 내 길을, 피나는 노력으로 해쳐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이들은 남들이 만든 프레임에 갇혀 평생을 보이지 않는 감옥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런 프레임으로부터 탈출하는 이들은 빛이 납니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완전히 이탈하여 남을 위한 삶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 또한 지나친 회피입니다. 자기 마당을 쓸지 않고, 남의 마당 쓰는데 인생을 다 소모하는 유형입니다. 이 두 가지 극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까요? 신앙의 길, 제 3의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저는 지난 수요일 대통령 취임 행사에 반짝반짝 빛나는 존재로 발돋움한 한 존재로부터 그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축시를 읽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어맨다 고먼입니다. 그 또한 어린시절 말더듬이였습니다. 그는 “째째한 사람들의 편견에 갇히”는 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말 하는게 어려워 글쓰는 데 집중"하는 편을 선택했다고 고백합니다. 파랑도 빨강도 아닌 샛노란 자켓으로 찬연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며 22세에 최연소 축시 낭독자로 무대에 선 고먼의 시 한 구절이 우리 신앙 여정에 하나의 등대가 되었으면 합니다. “빛은 언제나 존재한다. 우리가 그 빛을 직시할 용기가 있고 스스로 그 빛이 될 용기가 있다면” 공동체 성서읽기의 막이 올려졌습니다. 5일차를 지나고 있는 지금, 참가자 15명 모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매일 정해진 분량을 ‘듣고-읽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일사분란하게, 그리고 줄줄이 아멘을 외치며, 완료했음을 드러냅니다. 자랑스럽습니다. 고맙습니다. 잘하셨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비록 온라인일지라도 품이 많이 듭니다. 지난 한 달간은 기반을 다졌습니다. 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우리 형편에 맞게, 쉽게 다듬고 또 다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쯤 되면 하나의 조각 작품같고, 작가들의 말마따나, 자식같은 느낌으로 애지중지합니다. 그러는 사이, 의식의 흐름을 살핍니다. 새로운 것이 도래했을 때 기대와 환호는 군중들의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유대인들의 그러한 실패한 반응의 토대 위에 세워진 종교입니다. 열광보다는 침착하고, 중심을 잃지 않는 모습이 어울리는 신앙의 공동체입니다. 그렇게 깨달은 두 가지 신학적 성찰을 나눕니다. 첫째는, 공동체가 나를 구원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아니, 공동체로 얼마나 효과를 보고 있는데요?"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이해합니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환상은 금새 식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숙해도, 내가 보고 싶은대로 상대를 보기 마련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항상 참 좋습니다. 끝까지 좋은 분은 성령님입니다. 사람을 보지 않고, 성령님의 이끄심을 기대합시다. 둘째는, 공동체는 거울이라는 점입니다. 공동체 성서읽기의 성공 확률은 개인 성서읽기에 비하면 비교할 수도 없이 높습니다. 경쟁이어서가 아니라, 벗이 있어서입니다. 벗은 여러분의 거울입니다. 거울은 남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나를 보기 위한 도구입니다. 우리를 비추시는 빛되시는 주님과, 그 빛에 비쳐지는 내 모습에 대한 성찰을 통해 깊은 영적 신비를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공동체로 모일 수 있다는 게 축복입니다. 매일 기분이 좋습니다. 더불어 이 두 가지를 기억하며 200일동안 말씀과 함께 하길 축원합니다! 공동체 성서읽기 200일 프로젝트 가이드
성서는 오래전부터 읽는 것보다 회중에게 들려주는 방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을 대상으로 들려주었습니다. 내가 혼자 읽으려면 금방 지치고 말지만, 여럿이 함께 매일 시간을 정해서 들으면 끝까지 완독할 수 있습니다. 기간은 1월 11일부터 8월 31일까지, 시간은 1일 평균 30분간 듣게 됩니다. 프로젝트를 다 완수하시면 구약 1독, 신약 2독을 하게 되며, 개인별로 소정의 상이 주어집니다. 스마트폰이 없으신 분은 주보에 안내된 일정에 따라 소리내어 읽으시는 방법을 추천드립니다.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드라마바이블 App을 아이폰, 스마트폰에 다운로드 받습니다. (2) 앱을 열어서 아래쪽 탭에서 세 번째 아이콘(달력에 체크표시)을 누릅니다. (3) 위쪽 탭에 보면 97회, 122회, 200회가 있는데, 마지막 <200회>라는 글씨를 누릅니다. (4) 맨 처음 통독하는 날, 1번부터 누르고, 30분간 드라마성경을 듣습니다. 성경 본문은 음성에 따라 앱에 표시됩니다. 물론 자신의 성경을 이용하셔도 좋습니다.(개역성경) (5) 공동체 성서읽기 단체카톡방에 ‘아멘'으로 완료했음을 표시합니다. 최소 1주 한 번은 받은 은혜를 간략히 나눕니다. (6) 매주 수요일 밤 9시(동부시간)에 줌미팅을 통해 같이 듣고, 기도회를 갖습니다. 팁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조용한 공간을 한 군데 정해놓습니다. (2) 이어폰이나 헤드폰을 구비하시면 좋습니다. 누군가와 대화하면서 하기보다는, 30분이라는 시간은 온전히 하나님께 내어드리는게 도움됩니다. (3) 더 풍성한 통독을 위해 원하시는 분은 <찬송가-통독-중보기도> 순서로 진행하시면 좋습니다. 각자 교회에서 제공하는 중보기도카드와, 자신의 중보기도노트를 사용합니다. 남은 4달(9월-12월)은 통독기간 내 듣지 못했던 부분을 보충하는 시간으로 개별 활용하시면 됩니다. 또한 성서읽기 97일 프로젝트에 참여함으로 신구약 성서 1독을 추가하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매년 반복되는 인사이지만, 인류의 지혜가 녹아 있는 메시지입니다. 특별히 이번 해에는 그 의미가 남다른 것 같습니다. 어려움의 넓이와 깊이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더 찬란한 희망을 노래하는 것 같습니다. 그 노래가 이전처럼 복받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복고의 의미로만 불리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전통과 상투성의 차이는 질문입니다. 상투성과 질문이 만나 화학작용을 일으키면서 대대로 전해내려오는 인류의 지혜가 되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 물어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경계해야 할 신앙 형태는 상투성입니다. 수백년 전에 성찬 하나만 받아도, 오롯이 그 경험을 마음에 간직하고, 몇날 며칠을 그리스도와 함께 육화된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던 신앙은 사라졌습니다. 흔해진 것이지요. 신앙이 어디에나 널렸습니다. 온라인교회 시대가 되면서부터 이 현상은 가속화됩니다. 알고리즘은 여러분의 신앙생활 스타일도 감지합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게 배우자나 부모님이 아니라, AI입니다. 그들이 추천해주는대로 신앙생활을 마음껏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새 스승을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같은 스파크는 일어나기 힘들 겁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만남은 스승을 만나는 것인데, 그보다 중요한 것은 스승을 만나러 가는 순례길입니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지요. 주체적인 신앙형태는 누가 만들어줄 수 있는게 아닙니다. 그러나 단 한가지 예외가 있습니다. 공동체입니다. 공동체가 함께 둘러 앉아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되어 함께 신앙생활할 때, 기쁨은 배가 되고, 배움은 즐거움이 됩니다. 공동체가 있어 우리는 함께 시련을 이겨내고 있습니다. 이제는 극복을 넘어, 새로운 신앙을 다져나가는 진취적인 한 해가 되길 소망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우리 어린 친구들의 훌륭한 성구 암송과 공연이 있었습니다. 매년 하일라이트는 아이들의 노래 율동이지만, 올해는 아이들과 더불어, 똘똘 뭉쳐 찬양한 온라인 성가대(Virtual Choir)도 주목받기 충분했습니다. 모두 참 잘했습니다.
준비하면서 당연히 쉽진 않았습니다. 가지치기의 연속이었습니다. 대곡을 하고 싶은 욕심을 잘라내고 단순하고 소박하게 찬양에 열중했습니다.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기우를 잘라내고 자족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여곡절이 마지막에 있었습니다. 12시간이나 걸려서 만들었는데, 분명히 화음은 잘 들리는데,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퍽 퍽 하는 소리가 중간에 들립니다. 듣는 입장에서 귀가 아프면 아무리 좋은 선율이라도 불편합니다. 그래서 씨름을 해봤습니다. 원인을 찾았습니다. 잘 안들리는 사람의 소리를 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사람을 키우면 또 다른 사람 소리가 안들려서 또 키우고, 그러다 보니, 엄청나게 큰 소리로 변한겁니다. 그래서 모두 처음으로 돌렸습니다. 그리고, 거꾸로 접근해 봤습니다. 큰 사람의 소리를 작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제 목소리가 크더라고요) 플러스만 모였을 때 들어줄 수 없던 음악이, 조금씩 양보해서 마이너스로 조화를 이루자 고운 선율로 변했습니다. 교회도 어쩌면 이러한 합창의 원리가 적용될것 같습니다. 모두 배려하고 서로를 위해 내 자아를 깎 연습이 모여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세밑을 앞두고 귀한 깨달음으로 마무리 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기대가 됩니다. 모두 한 해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사랑합니다. |